춤추는 사이보그 안은미 – 김홍희

<춤추는 사이보그 안은미>

김홍희(경기도미술관 관장/미술평론가)

 

1. 

2009년 10월 29일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에 위치한 경기창작센터 개관식 행사에 안은미의 크레인 공연이 초연되었다. 경기창작센터가 설립된 사이트는 일제말 부랑아 수용 시설인 선감원이 있던 곳이다. 사회적응을 위하여 직업 훈련을 받던 10-15세 청소년들이 바다에 떨어져 목숨을 버렸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 선감원 자리에 후일 경기직업전문학교가 세워지고, 2008년 그 학교가 타지역으로 이전하면서 비워진 건물에 들어선 것이 경기창작센터였다. 경기도미술관 관장으로서 경기창작센터 개관을 준비하던 나는 개관식 공연 행사로 물에 빠져 죽은 청소년들의 진혼제를 생각하고 당연히 안은미에게 공연을 부탁하였다. 평소 그녀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지만 그녀야말로 우리가 기대하는 샤먼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전위적 진혼제를 올려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서였다.

 

안은미가 명명한 공연 제목은 <모세의 기적: 자유를 위한 성찰>이었다. 하루 두 번씩 바닷길이 열린다고 해서 ‘모세의 기적’이란 별칭을 가졌던 대부도, 그 대부도에 딸린 작은 섬인 선감도가 이제 일제 강점기의 슬프고 아픈 역사를 털어버리고 경기창작센터를 통해 자유와 창조의 고장으로 재탄생할 것이라는 당찬 염원을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안은미는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을 창안, 주도할 경기창작세터의 도약적 창조 에너지를 크레인을 타고 하늘에서 춤을 추는 공중무로 표현하였다. 

 

크레인에 몸을 매단 채 하늘을 무대로 허공을 배경으로 그 특유의 춤사위를 과시한 안은미, 그녀의 진혼제 퍼포먼스는 개관을 축하하려고 먼길을 찾아 온 수많은 관객들을 제압하기에 충분히 도발적이고 계발적이었다. 안은미의 무용에 제법 익숙한 나도 그날은 특히 그 강렬하면서도 엄숙하고, 작열적이면서도 진지한 크레인 공연에 크게 감동되어 안은미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녀가, 그녀의 춤이 그토록 강한 흡인력으로 우리를 몰입시키는 까닭은 무엇인가하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안은미는 우리를 춤춘다. 인간 행태와 인식 구조에 기반한 소설, 제식, 또는 중세의 카니발과 같이 안은미의 춤은 인간의 삶을, 삶의 본질을 대상화하고 광경화한다. 개념적이고,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고급예술보다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대중 양식으로 우리를 자유, 상상, 풍요, 무의식의 유토피아에 잠시 머물게 한다. 그녀가 초대하는 유토피아는 만인이 동등하고 만인이 물질적, 영적으로 연결된 민주적 소통의 세계이자 출산과 죽음, 시작과 종말의 구분이 없는 영구적 순환의 세계이다. 

 

안은미의 유토피아는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감되는 공감각적 세계이다. 누드의 상체, 삭발의 맨머리, 비무용적인 원초적 몸동작, 성녀적인 동시에 마녀적인 용모와 표정, 강렬한 원색과 순백의 모노크롬이 극단의 대조를 이루는 창조적인 무대 의상 등, 안은미의 “시그내쳐 스타일”은 시각을 넘어서 오감으로 관객을 긴장시키고 전율시키는 물질적 춤으로 정의된다. 

 

몸에서 몸으로 전달되고 감각에서 감각으로 이어지는 안은미의 물질적인 춤은 “그로테스크” 미학과 맞닿아 있다. 웃음과 공포, 기괴와 마력, 화려함과 메스꺼움, 섬세와 과장 등, 양립 불가능한 이질적 요소들을 대립, 충돌시키면서 쾌와 불쾌의 엇갈리는 감흥을 야기시키는 그로테스크 미학은 바로 안은미, 안은미의 춤을 규정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로테스크가 그러하듯, 안은미의 춤은 과대, 과장, 과도, 과잉으로 지성이나 이성보다는 감흥과 감정에 호소하는 감각적인 유형의 것이다. 그러나 그로테스크가 그러하듯, 그것은 단순히 초과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 표준을 벗어나는 것 이상의 모반적 의미를 지닌다.

3. 

그로테스크는 규범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며, 신체적 범주로 보자면, 고전신체, 모더니즘 신체와 상반되는 비정상적이고 변이적인 신체를 뜻한다. 변형적인 그로테스크 바디는 반항과 위반을 대변하는 정치적 신체이자 신체적 억압에 도전하는 저항적 신체로서 성적 정체성을 전복하는 여성적 그로테스크를 함의한다.

 

어원적으로도 그로테스크는 동굴같이(grotto-esque) 깊고 어두운 지형적 특성이 여성신체의 해부학적 메타포로서 작용하면서 고대에는 대지의 여신, 마녀와 같은 부정적 여성 이미지와 결부되는 한편, 현대에 와서는 고대적, 모계적 그로테스크를 정치적으로 번안한 새로운 페미니즘 신체 담론으로 등장한다. 기존의 페미니즘이 여성을 남성에 대한 차이로 규정하며 여성성을 찬양, 강조하였다면, 여성적 그로테스크 담론은 남녀를 서로 닮았지만 같지 않은 “이원성 쌍둥이”로 상정한다. 

 

다시말해 여성적 그로테스크는 그로테스크라는 범주안에 남녀 신체 모두를 위험과 비천함으로 동일화하면서 성정체성 문제를 무화시킨다. 신체적 비천함은 사회정치학적, 언어적 소외를 동반하면서 성정체성의 붕괴라는 우리 시대 최대, 최종의 위기로 약호화된다. 전통 여성성, 젠더 정체성에 도전하듯 삭발을 하고 탈육감적 반나와 파편적 부위로 비천함을 강조하는 안은미의 춤, 그녀의 춤추는 몸이 예증하듯이, 여성적 그로테스크 바디는 무성 또는 양성의 그로테스크 바디로 환원된다.

4. 

그로테스크 바디는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이고 황당무괴해보이지만 실상 사실적이고 물질적인 리얼리즘으로 구현된다. 그러한 물질적 현실성과 구체성이 그로테스크 바디에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요소이다. 그로테스크 바디는 물질적 신체 현실에 입각하여 신체를 육체성, 성욕으로 환원시키며 생식기, 배설물, 분비물과 동일시한다. 동물성, 양성성으로의 변신과 파편적 신체로서의 고립화가 그로테스크 바디의 희화적이면서도 “언캐니”한 공포적인 양상이다. 

 

그로테스크 바디를 수행하는 안은미의 춤이 코믹하면서도 공포스러운 까닭은 그것을 통해 인간 실존과 소외와 고통이 표출되기 때문이다. 실존적 공포는 희극으로 격퇴되기 보다는 비인간적, 이방인적, 악마적인 파워를 행사하며 또 다른 심리학적 층위를 형성한다. 관객을 감염시키고 관객을 흡입하며 호기심과 혐오감을 동시에 일으키는 안은미 춤의 마력은 바로 파괴적이고 생성적이며, 물질적이면서도 심리적이고,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유쾌하면서도 불쾌하고, 해방적이면서도 억압적인 그로테스크 바디의 양면성, 그 애매모호한 경계의 미학에 기인한다. 

 

그로테스크 바디는 경계에 기거한다는 점에서 사이보그의 원형이 된다. 1990년대 이후 사이버네틱 저항문화와 함께 대두된 사이보그는 남/녀, 인간/동물, 인간/기계, 생/사의 구분을 초월하는 유토피아적 경계의 피조물로서 그로테스크의 이중성, 잡종성, 혼성을 반복한다. 인간과 기계의 하이브리드, 젠더가 존재하지 않는 포스트젠더로서의 반자연주의적 전복성이 동물적인 동시에 기계적이고 여성적인 동시에 남성적인 춤사위로 무용의 범주를 초월하는 안은미의 춤에서 예시된다.

5. 

안은미는 그로테스크한 사이보그다. 영화에서나 미술 작품으로 보는 사이보그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 인간으로 현현한 사이보그,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사이보그다. 춤추는 사이보그로서 그녀는 나와 타자, 에고와 이드, 희망과 절망, 현실과 환상, 상징계와 상상계를 왕래하며 새로운 유형의 이중적 자아를 창조한다. 

 

안은미는 춤을 통해 자기변신, 자기해방을 시도한다. 역사적, 사회적 압박이나 유전적 코드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그녀는 사이보그의 외피, “제2의 살갗”을 입는다. 강렬하고 기괴한 무대 의상은 물론, 맨머리, 맨몸이 물질적이면서도 심리학적인 제2의 살갗이 되어 자신의 한계를 침범, 능가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이자 자신의 분신인 분리자아를 창조한다. 제2의 살갗을 입은 원초적이고 혼성적인 사이보그로서 거의 식인적인 흡인력으로 우리를 삼켜버리는 것이 안은미 춤의 실체이자 독보적 특성이다. 

 

춤추는 사이보그 안은미를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가 상실한 것, 우리 내부에 억압된 리비도, 괴물, 샤만, 키메라를 발견한다. 물질적 신체, 심리학적인 신체이자 사회적 신체, 정치적 신체인 그녀의 그로테스크 바디가 유인하는 곳은 만인적 잔치가 벌어지는 유토피아이다. 유토피아를 경험케 하는 안은미의 그로테스크 바디, 그녀의 사이보그 댄스는 생물학적 개인, 부르주아 에고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라나고 새로워지는 변혁의 주체, 현실과 가상의 경계지대에 기거하는 혼성적 주체만이 행할 수 있는 불가능한 가능태로 예시된다. 그것을 우리는 그냥 춤이라기보다는 춤으로부터 일탈된 “탈” 춤, 춤이 몸을 변형시키고 몸이 춤을 변형시키는 “몸” 춤, 사이보그만이 출 수 있는 경계적 “틈새”의 춤이라고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