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미, ‘사람의 예술’을 하는 사람 – 전우용

안은미, ‘사람의 예술’을 하는 사람

전우용

 

 

2009년 봄의 어느 날, 휴대전화기에 모르는 전화번호가 떴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스팸 번호 같지는 않아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건 이는 자기가 무용가라며 다짜고짜 한번 만나자고 했다. 도대체 무용가가 역사학자에게 무슨 볼 일이 있다는 걸까? 그때까지 무용 공연이라고는 발레와 전통무용을 각각 한 차례씩만 접했을 뿐이다. 그것도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어쩌다’ 끌려가다시피 공연장에 간 경우였다. 무슨 얘기를 듣고 싶어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하이서울 페스티벌’ 예술 감독을 맡아 서울에 관해 공부하는 중인데, 내 책 『서울은 깊다』를 읽고 나서 궁금증도 생겼고 내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어 수소문 끝에 연락했다고 대답했다. 내가 무용가 안은미와 인연을 맺은 경위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당시 내 직장 부근이던 혜화동 어느 카페였던 것 같은데, 무용가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내 선입견을 확실히 깨는 모습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집시 옷을 입은 비구니였다. 인상은 강렬했으나, 함부로 판단하고 정의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엄격함과 분방함, 원숙함과 천진함, 코스모스와 카오스, 남성성과 여성성, 세련됨과 투박함이 함께 느껴졌다. 사람이 수십 년 세월을 살다 보면, 저 사람은 누구랑 비슷하다거나 저 사람 성격이 차가워 보인다거나 저 사람과는 친해지기 어렵겠다 등의 판단 준거를 스스로 만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이제껏 살면서 만나 본 사람들은 물론, 역사책과 사료를 통해 접한 그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그가 자기 인간성을 확장시킨 사람이며, 그 확장된 인간성으로 온갖 종류의 사람을 포용하는 품이 넓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를 두 번째로 만난 곳은 서울문화재단 회의실이었다. 직간접으로 관련되는 여러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한 자리였고, 내게는 예술 공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할 정도의 식견도 없었기 때문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을 말 몇 마디만 하고 말았다. 회의는 한두 차례 더 있었지만, 형식적이거나 의례적이었다. 이런 종류의 자문회의에 참석하는 일은 아주 흔했고, 행사가 끝나면 자문위원과 연출자 사이의 관계도 끝나기 마련이었기에, 나는 안은미를 더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해 겨울,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한국인의 몸과 예술을 낳은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안은미를 만나기 전의 나는, 학자는 이성에 집중하고 예술가는 감성에 의존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이런 편견은 그를 만난 덕에 깨졌다. 그는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 노력하면서 이성과 감성을 융합하는 예술가였다. 그는 잠시 짬이 생긴 틈에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인들이 춤추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었는데, 그들의 춤사위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그는 그 영감을 언어로 표현하는 문제에 대해, 그들의 삶과 춤사위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내 의견을 물었다. 마침 그 무렵에 나는 한국 의료사를 연구하면서 사람의 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찍어온 동영상을 보면서 나는 역사가 사람의 기억뿐 아니라 몸에도 새겨진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춤사위에는 한 눈으로도 확인되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이 춤으로 표현하는 것이 곧 한국의 현대사였다. 그들의 춤은 유럽 각국의 민속무용이나 고전무용과는 확연히 달랐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전통무용도 아니었다. 전통과 현대, 서구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그들의 몸에 분리할 수 없는 상태로 통합되어 있었다. 이 불가분리(不可分離)의 혼종성(混種性)이야말로 식민지 지배를 겪은 민족들의 문화적 특질이다.

 

나를 정말 놀라게 한 것은, 사람의 몸에서 역사를 끄집어내는 그의 능력이었다. 근엄한 모습을 꾸미는 데 익숙한 한국의 노인들로 하여금 거리에서, 시장에서, 마을회관에서, 노인정에서 춤추게 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는 시간이 쌓아 올린 두꺼운 관습의 벽을 쉽게 무너뜨렸고, 이성과 감성 사이를 마음대로 넘나들었다. 역사학자들은 한 명의 노인으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전해 듣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왜곡된 기억, 그것도 발화(發話) 시점의 상황에 영향 받은 기억인 경우가 많다.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왜곡한 이야기들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은 무척 어렵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가 휴대전화기 화면으로 보여준 동영상에는 어떤 꾸밈도 없었다. 거기에 분식(粉飾)되지 않은 역사가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면서 나도 그의 흡인력에 빨려 들어갔다. 서로 의기가 투합하여 한국인의 몸 동작을 아카이빙하기로 합의했다. 그가 한국인의 몸 동작들을 수집하여 기록으로 만들면, 내가 그 기록들에 해제를 달고, 다시 그가 해제를 참고하여 춤으로 표현하기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모한 합의였다. 한국인의 ‘막춤’은 어디에서 기원하며, 어떤 집단적 정서와 감성을 표현하는 것일까? 한국 문화 전체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감히 손댈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내게는 그럴 능력도 자격도 없었다. 그래도 이왕 합의한 이상, 어떻게든 몸에 새겨진 역사를 추적해야 했다. 일단 시작하기로 마음은 먹었으나, 언제 마무리할 지는 기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난마처럼 얽혀있던 내 생각의 실타래를 한 차례 공연으로 과감하게 끊어버렸다.

 

2011년 2월, 안은미는 그의 카메라 앞에서 춤을 추었던 할머니들과 함께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창작하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 무대에 올렸다. 그는 이 공연 팸플릿과 보도 자료에 내 이름을 기재했다. 무용 공연에 스태프로 참여한 역사학자는 한국에서 아마 내가 유일할 것이다. 나는 준비가 안 된 채로, 안은미가 춤으로 표현한 뜻을 1/10도 담지 못한 어설픈 원고를 썼다.

 

“역사는 글로 기록되기 이전에 먼저 몸에 새겨집니다. 몸에 새겨진 역사는 글로 기록되어 책에 담긴 역사보다 수명은 짧으나 내용은 훨씬 충실하고 치밀하며 방대합니다. 물론 아무나 타인의 몸에 새겨진 역사를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사람의 몸은 비록 작지만, 평생에 걸쳐 만든 비밀들을 다 간직할 정도는 됩니다. 그의 비밀을 읽으려 애쓰는 사람, 그 비밀의 코드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만, 몸은 자신의 역사를 드러냅니다.

 

나무를 아는 사람들은 나이테만 보고 나무가 견뎌낸 세월을 읽습니다. 처참히 잘라져 밑둥조차 남지 않은 나무토막조차도 자기가 서 있던 방향이나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에 관한 기록을 몸뚱이에 새겨둡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언제나 되풀이되지만, 오고 가는 때나 덥고 추운 날씨가 한결같지는 않습니다. 지구의 규칙적인 자전과 공전에 따라 만들어지는 자연의 리듬에도 변주가 있습니다. 나이테는 한 해에 한 켜씩 규칙적으로 새겨지지만 켜마다 모양은 다 다릅니다. 규칙성 안에서 표현되는 불규칙성이 한 그루 나무의 개성을 이룹니다. 규칙적이되 불규칙하기에, 나무는 판자가 되어서도 음악적 리듬을 간직한 아름다운 결을 남깁니다. 

 

역사상의 모든 시대도 나름의 리듬을 갖습니다. 사람이 만들고 겪는 시대의 리듬에는 나무가 겪는 리듬보다 훨씬 다채로운 변주와 불협화음이 섞여 있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사회의 변화는 자연의 변화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역동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세월의 리듬을 오롯이 몸에 새겨둡니다. 농업 사회와 산업 사회는 움직이는 속도와 방향이 다릅니다.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전환하는 시대에는 또 그 나름의 독특한 변주가 있습니다. 

 

시간에 대한 관심, 시각을 인지하는 단위, 노동 시간과 휴식 시간의 배분, 소년기와 노년기의 구분 기준이 시대마다 다릅니다. 낯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 친한 사람 사이의 인사법, 이성 관계에 대한 생각도 시대마다 다릅니다. 걷고 뛰는 자세, 일할 때 주로 쓰는 근육, 거리에 대한 감각도 시대마다 다릅니다. 그 다른 것들이 시대에 고유한 리듬을 만듭니다.

 

현대의 노인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몸에는 식민지 백성의 설움과 전쟁 피란민의 고통, 이념 대결의 갈등,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산업 전사의 고생이 그대로 새겨져 있습니다. 상황마다 리듬이 달랐기에, 그들의 몸이 기억하는 리듬은 불규칙하며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변덕스럽고 일관성 없는 여러 시대의 리듬들도 한 사람의 몸 안에서는 어떻게든 조화를 이룹니다. 그렇게 사람은 새 리듬을 창조합니다.

 

음악은 시대의 리듬을 표현합니다. 몸이 음악을 만나면 춤이 됩니다만, 역사가 된 몸이 기억하는 리듬과 한 시대를 대표하는 리듬 사이에는 언제나 넓든 좁든 간격이 있습니다. 노인들은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만이 아니라, 자기 몸이 기억하는 리듬과 이미 자기가 더는 주인공이 아닌 시대의 리듬 사이에 넓은 간격이 생긴 때문에, 이 시대의 리듬에 자기 몸을 맞추지 못합니다. 달리 말하면, 노인의 몸과 그 몸에 담긴 생각은 시대의 변화를 따르지 못합니다. 

 

노인들 자신이 이 시대와 자기 몸 사이에 넘기 어려운 벽이 있음을 느낍니다. 그보다도, 이 시대가 노인들의 몸이 기억하는 리듬을 수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사람들은 그 리듬이 시대에 맞지 않고 더 발전할 길이 없으며 얼마 안 있어 소멸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가 노인들을 그들만의 세계에 가두고 그 주위에 벽을 쌓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그 벽은 누구나 오래지 않아 넘어야 할 벽입니다. 아무리 높고 단단하게 쌓아도, 노인의 세계로 들어가는 벽을 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벽을 쌓더라도 허술하고 낮게 쌓아야 합니다. 노인들이 가끔 되넘어와 어색한 몸짓으로라도 어울릴 수 있도록, 그렇게 쌓아야 합니다. 젊은이들도 언제든 고개만 돌리면 벽 너머를 바라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노인이 곧 자신의 미래임을 자각할 수 있도록, 그렇게 쌓아야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모두가 알아내려 애써야 합니다.”

 

안은미는 이 공연을 통해 한국 노인의 몸에 새겨진 역사를 역동적으로 드러냈을 뿐 아니라, 예술과 비예술, 노인과 젊은이, 전통과 현대, 낯섦과 친근함, 서유럽과 동아시아, 무용수와 관객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모든 장벽을 허물었다. 무대 공간은 좁았으나 세계가 담겼고, 공연 시간은 짧았으나 역사가 흘렀다.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는 문화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고, 유럽 무대에까지 진출해 호평(好評)을 받았다. 덕분에 시골 할머니들도 유럽 구경을 했다. 안은미와 할머니들이 유럽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장면을 보지 못한 건, 내게는 오랫동안 유감으로 남을 것이다.

 

어쩌다 안은미 공연에 관여하기는 했지만, 내게 무용계는 안드로메다 은하계처럼 먼 곳에 있었다. 한가지 프로그램으로 몇 차례나 공연하는지도 당연히 몰랐다. <조상님께 바치는 땐스>가 문화예술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킨 만큼, 적어도 1년 정도는 반복해서 공연하리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다시 연락이 왔다. 공연을 거듭했으니 좀 쉬어야 했을 텐데, 그는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다시 만난 안은미는 대뜸 이번에는 청소년의 몸과 춤을 기록하자고 제안했다. 역사학자의 관성에 따르면, 60대 이상의 노인 다음으로 살펴야 할 대상은 40~50대의 중장년이다. 그런데 20~30대 청년도 아니고 60년 세월을 건너뛰어 바로 청소년이라니. 역사학자들은 시간의 공백, 역사의 비약과 단절을 가장 불편하게 여긴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아마도 내심은 심드렁하고 떨떠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대화하면서, 나는 관성이 범하는 오류를 자각했다. 현실의 청소년은 노인의 손자뻘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노인의 조상뻘이기도 하다. 노인의 몸이 역사가 깊게 새겨진 육비(肉碑)라면, 청소년의 몸은 역사가 새겨지지 않은 몸, 역사 이전의 몸이었다. 역사가 새겨진 몸을 이해하려면 역사가 새겨지지 않은 몸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니, 이보다는 안은미의 생각에 나도 모르게 동조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생각을 모았으니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나는 생각과 행동 사이의 거리가 먼 축이지만, 그는 생각과 행동을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한국의 10대 청소년들이 등에 진 ‘현실’이 지나치게 무겁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몸은 현실에 짓눌린 몸이었다. 대학입시를 인생 최대의 난관으로 생각하는 아이들, 시험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모두 ‘나쁜 짓’으로 정의하는 부모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남들 공부하는 시간에 춤추겠다는 청소년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예술고등학교 무용과 학생들을 모집하는 방안도 생각해보았으나, 안은미는 ‘남이 가르친 춤사위’가 몸에 스며들지 않은 청소년을 원했다. 대한민국에 예술고등학교 말고 수십 명의 학생을 무대 위에서 춤추라고 내보낼 학교가 있을까? 궁하면 통하는 법. 내 아들 녀석 학교가 떠올랐다.

 

당시 내 아들이 머물던 서울국제고등학교는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특수목적 학교이자 ‘실험적’ 학교였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입시 준비뿐 아니라 다양한 동아리 활동과 체험 학습도 권장했다. 학교의 교육 방침이 한국적 상황과 무관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국제 표준에 조금은 더 가까웠다. 안은미에게 그 학교 교장과 의논해 보라고 말했더니, 그는 즉시 움직였다. 교장은 흔쾌히 승낙했고, 곧바로 1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내 아들 녀석에게도 무대에서 춤추는 경험을 한 번 가져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지만, 낯가림이 심한 녀석은 학생 모집하는 교실 문 앞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하지만 주말마다 집에 오는 아들에게 ‘임시 땐스반’의 소식은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춤을 연습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공연 준비하는 아이들이 안은미를 ‘엄마’라고 부른다는 말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말을 들은 직후에는 잠시 놀랐으나, 곧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알다시피 안은미는 비혼(非婚)이고 아이도 없다. 그는 ‘엄마’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엄마’라고 부를 정도로 넉넉한 엄마의 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안은미에게서 늘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엄마보다 더 엄마다운 모습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2012년 2월, 안은미는 <사심 없는 땐스>를 다시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무대에 올렸다. 안은미가 어떤 사색 끝에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제목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나는 ‘한국인의 몸 아카이브’라는 취지에 비춰 무척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심’을 ‘사심(私心)’이자 ‘사심(史心)으로 이해했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는 상황에서도 잃지 않은 순수함을 ’사심(私心) 없음‘이라 한다면, 역사의 때가 묻지 않은 마음은 ’사심(史心) 없음‘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무대 위에 선 학생들의 몸에서 압도적 ’현재성‘을 봤다. 아이들 그룹의 춤사위를 어설프게 흉내 내거나, 그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그들의 몸짓은 한국적이라기보다는 국제적이었다. 그들의 몸에는 분단과 전쟁, 빈곤과 독재정치가 남긴 상처가 없었다. 이 아카이빙에서도 해제는 내 몫이었다. 그 글 중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요즈음 새삼, 학교 교육이 문제다. 열 살 남짓할 때부터 꿈에 그리던 명문대학에 입학하고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학생들이 여럿이다. 대학생들은 학점, 등록금, 취업 등 숱한 걱정거리에 묻혀 허우적댄다. 많은 대학생이 등록금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보내고, 취업에 필요한 스펙 갖추려 토익 토플 공부에 매달린다. 학과 공부는 뒷전이다. 어쩌면 한국의 대학생들은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대학생들일 것이다. 대학 시절이 꿈과 낭만이 가득한 행복한 시절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꿈과 낭만’에서 벗어나지 못한 말일 뿐이다.

 

그런데도 초 중 고등학생은 이 고통스러운 대학 생활을 ‘누리기’ 위해 당장의 삶을 단조롭고 황폐하게 보낸다. 이 시대 부모들은 “미래를 꿈꿀 시간 있으면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라”라며 아이들을 윽박지른다. 특히 고등학교는 ‘감옥’이거나 심지어 ‘지옥’으로까지 묘사된다. 학생들은 이 감옥에서 석방되기만을, 이 지옥에서 해방되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일찍이 공자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말했으나, 오늘날 한국의 학교에서 배움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다. 불과 50-60년 전만 해도, 수많은 아이들의 소원은 ‘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수많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꾸고 있다.(중략) 

 

처음 신식 학제가 만들어졌을 때, 고등학교는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배우는 곳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소학교 4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략 10년만 배우면 사회의 중견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대학은 최고 수준의 전문적 학문을 익혀 직업 학자가 되기 위한 곳이었다. 그 무렵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였으니, 10년을 학업에 쏟아 붓는 것도 길었다. 그러나 지금 고등학교는 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학교에 불과하다. 더구나 대학에 진학한다고 해도 장래가 불투명하다. 좋은 대학, 명문 대학에 들어가야만 그나마 불안감을 덜 수 있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학업에 대한 부담감과 장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산다. 그나마 불안감을 느끼는 학생들은 ‘모범학생’들이다. 미래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할 시기에, 그들은 그 꿈조차 유보해야 한다.(중략)

 

정체성에 대한 혼란, 미래에 대한 불안, 고강도 학습, 경쟁과 협동의 상충을 반복해야 하는 교우 관계, 학교 교사의 권위에 대한 회의, 부모의 기대와 자기 역량 사이의 격차에 대한 인식 등이 학생들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성적을 비관한 자살, 가출, 일탈과 비행, 자포자기가 학교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정당한 권위를 인정하는 법, 더불어 살고 어울려 사는 법, 공정하게 경쟁하는 법 등은 학교 교육에서 부차화하거나 무의미해졌다. 학교생활은 고통의 연속이며, 학생들이 몸으로 배우는 것은 주로 그 고통을 견디는 법이다. 

 

어떤 문제든 참고 견디는 것보다는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 해결에 도움이 된다.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 앞에 고정돼 있는 학생들의 몸을, 학업과 경쟁 스트레스에 찌든 학생들의 마음을, 학생 스스로 보고 느끼고 표현하게 한다면, 학생들 자신에게, 교사들에게, 학부모들에게, 교육 문제를 다루는 행정가들에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을 학교 밖으로 불러내어, 자기 얘기를 자기 몸으로 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모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가정적 요구와 기대를 떠나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이야 말로 교육의 본령이 아닐까? 학생들이 자기 내면에서 자기도 모르게 불타고 있는 에너지를 몸으로 표현하고 발산시키는 경험도 진정한 의미에서 ‘교육적’일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한국인의 몸 아카이빙’ 작업은 2013년 <아저씨들을 위한 무책임한 땐스>, 2014년 <스펙타큘러 팔팔땐스>로 종결되었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 간, 나는 안은미가 한국인의 몸과 동작을 탐색하고 기록하며 표현하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조언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조언을 하면서 그의 기록물들에 역사학적 해제를 달았다. <아저씨들을 위한 무책임한 땐스>는 나와 안은미가 속한 ‘바로 그 세대’의 춤이었다. 젊은이들에게 꼰대, 개저씨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 직장 일이나 열심히 하고 가정에는 무심한 게 ‘남자다운’ 태도라고 믿으며 살아온 사람들, 그러면서도 직장과 가정 양쪽 모두에서 무거운 책임을 요구받는 사람들, 그 요구를 내면화한 사람들. 서로 다른 인생행로를 걷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살아갈수록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비혼(非婚) ‘여성’ 안은미는 ‘아저씨’들과 아주 먼 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무거운 책임감에서 몸을 해방시키는 데에 젠더는 무의미했다. 인간 몸의 해방을 탐색하는 그의 몸짓은, 세대차와 성차(性差)를 뛰어 넘었다. 이 아카이브에 대한 해제는 굳이 소개하지 않는다.

 

<스펙타큘러 88땐스>는 도시 공간과 도시민 사이의 상호 관계에 관한 춤이었다. 그의 구상을 두고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그는 도시 공간을 촬영한 뒤 아주 빠른 속도로 재생하면, 건물들이 춤추는 것처럼 보일 거라고 얘기했다. 시간을 압축해서 전시하는 것은 본래 역사학의 전문 영역이다. 물론 내 덕은 아니지만, 그는 역사학자적 통찰력까지 보여주었다. 나는 춤추는 건물들의 콘크리트 벽 안에 갇혀 종일을 보내는 사람들의 몸에 대해 썼다.

 

”창밖으로 기차가 보인다. 불현듯 저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숨이 막힐 정도로 도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인공 구조물들의 숲에서 벗어나 자연을 보고 싶다. 자연을 느끼고 싶다…..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 똑같은 행위와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 일상(日常)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다. 주말이나 휴가철이면 도시 밖으로 빠져 나가려는 자동차들이 장사진을 이루는 도로는, 이 욕망의 표현이다. 현대 도시민들이 도시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은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죄수들의 욕망만큼이나 간절하다. 이들은, 아니 우리는, 왜 스스로 선택한 도시적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수시로 탈출을 꿈꾸는 것일까?

 

아침에 눈을 뜬다. 사방이 벽이다. 출근하기 위해 현관문을 나서 엘리베이터에 탄다. 역시 사방이 벽이다. 지하 주차장에 세워 둔 자동차에 오른다. 역시 사방이 벽이다. 회사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탄다. 또 사방이 벽이다. 사무실에 들어가 제 자리에 앉은 뒤 잠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또 사방이 벽이다. 점심시간, 모처럼 건물 밖으로 나선다. 도로 위는 하루 종일 벽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많은 고층 건물들이 마치 벽처럼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현대 도시의 삶은 벽 안에 갇힌 삶이다. 설령 그 벽이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벽은 어쩔 수 없는 벽이다. 갇힌 삶이다. 닫힌 삶이다. 감금당한 삶이다.

 

사람들이 새소리를 들으며 소를 몰아 논밭을 갈던 옛날, 사람들이 들판을 달리며 사냥감을 쫓던 더 먼 옛날, 그때는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없었다. 있어도 적고 작았다. 도시화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두텁고 높은 벽을 치는 과정이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벽이 낡으면, 더 크고 더 높은 벽을 세워 올렸다. 그래서 그것은, 본래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서 자연성을 소거(消去)하는 과정이었다. 현대 도시는 사람들에게 편익을 제공하는 대신 인간으로서의 본성, 즉 인간성을 억제하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려는 욕망은 마치 자궁 회귀 본능처럼 현대 도시민들의 잠재의식 안에 유폐되어 있다가 수시로 탈출을 시도하곤 한다. 물론 탈출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 탈출은 귀환을 전제로 한 한시적 탈출이다. 그 탈출은 도시가 요구하는 속박 상태를 견뎌내기 위한 일시적 힐링일 뿐이다.

 

현대 도시민의 일상적인 동작은 또 어떤가? 현대 문명은 거듭거듭 사람의 근육 운동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인간적 척도를 멀찍이 뛰어넘는 초거대 건물과 진보된 교통수단들은 사람에게 ‘운동’을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버튼 하나만 누르면, 가만히 서 있어도 엘리베이터가 수백 미터 위까지 올려다 준다. 가만히 앉아서 팔다리만 아주 조금씩 움직이면, 자동차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데려다 준다. 앉은 듯 누운 듯한 자세로 잠을 자고 있어도, 비행기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내려놓는다. 기계의 움직임이 민활해지는 데에 반비례해서, 사람의 움직임은 지둔(遲鈍)해졌다. 

 

인간의 자아실현 과정이라는 노동도, 인간성을 파편화, 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밭을 갈거나 돌을 캐거나 나무를 베거나 쇠붙이를 벼리거나 하는 과거의 모든 노동 행위는, 사람에게 전신 근육을 다 사용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현대의 기계 문명은, 사람 근육의 특정 부위만을 요구한다. 하루의 노동 시간 내내 눈동자와 손가락만 움직이는 사람, 귀에는 이어폰, 입 앞에는 마이크를 달고 눈동자와 입만 사용하는 사람, 드라이버에 나사를 끼워 시계 방향으로 돌리는 일만 반복하는 사람 등. 심지어 몇 톤짜리 무거운 돌을 옮기는 일도, 단 한 사람의 팔 다리 근육 일부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현대의 기계문명은 사람 근육의 대부분을 경제적 효용 가치가 없는 것,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한다. 현대인들이 운동장으로, 헬스클럽으로, 나이트클럽으로 향하는 것은, 경제적 가치를 잃어버린 자기 전신 근육의 생명을 어떻게든 지켜 내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이번 안은미의 도발은, 벽에 갇혀 자연성을 소거(消去) 당한 현대 도시민의 삶,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완전성과 균형성을 상실한 현대 도시민의 몸을 향한다. 훌라후프는 아주 상징적이다. 사람이 자기 허리에 훌라후프를 걸고 돌리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훌라후프는 사람의 동작을 지배하고 궁극적으로 사람의 몸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사람에게 허리 돌리기라는 똑같은 동작을 요구한다. 훌라후프를 계속 돌게 하려면, 계속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사람이 동작을 멈추면, 훌라후프는 땅에 떨어진다. 훌라후프 돌리기는 현대 도시 생활의 환유이다. 훌라후프가 요구하는 동작을 거부하고서도, 훌라후프를 계속 돌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훌라후프 돌리기를 아예 그만 두면 안 될까? 물론 예술은 사회과학이 아니다. 인간 삶의 자연성과 인간 몸의 완전성을 회복하려는 예술가의 대담한 도전은, 지식 밖의 지식을 탐색하는 일이다. 안은미, 파이팅!

 

‘한국인의 몸 아카이빙’ 외에도 나는 <어른들을 위한 몸놀이 공장 3355>(2014), <대심땐스>(2017), <쓰리쓰리랑>(2017) 등의 공연 컨셉과 관련해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팸플릿에 해제 글을 썼다. 그 얘기들을 다 소개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내게 2009년 이전의 안은미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안은미는 이 시대의 역사적 문제들을 고뇌하고, 사람들과 아픔을 나누면서, 그 고뇌와 아픔의 페이소스를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2분짜리 대중가요든 1시간짜리 교향악이든 모든 음악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콘서트홀에서 들으면 더 좋겠지만, 야외에서 듣는다고 해서 음악이 음악 아닌 다른 것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소리는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 본래 음악은 천상의 소리를 지상에 전하는 예술이었다. 인간이 인지하는 천체의 리듬이 시간이다. 음악은 천상의 예술이자 시간의 예술이다. 반면 미술 작품은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림이든 조각이든 미술작품은 일정 공간을 점유한 채 백 년 천 년을 버틴다. 미술은 시간에 저항하는 예술이며 반(反) 시간적 예술이다. 그것은 공간의 예술이자 땅의 예술이다. 미술 장치와 음향 안에서 인간의 움직임을 전시하는 무용은 하늘을 이고 땅을 디딘 채 사는 인간의 예술이다. 언젠가 안은미와 나눴던 얘기다. 나는 여전히 무용에 대해 잘 모르지만, 무용의 궁극은 ‘사람다움’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0년 간 안은미는 노인, 청소년, 아저씨, 장애인, 군피해 유가족 등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고통, 슬픔, 분노, 애원(哀怨), 희망 등을 함께 느끼고, 물질과 기계더미에 깔려 질식해 가는 ‘사람다움’을 해방시키고자 노력해왔다. 그는 ‘사람의 예술’인 무용을 하는 사람이고, 무용가 중에서도 특별히 ‘사람의 춤’을 잘 추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