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큘라 88땐쓰 – 송현민, 김남수

<스펙타큘라 88땐쓰>

송현민(음악평론가)

 

2010년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2011년 ‘사심 없는 땐스’, 2012년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를 선보였던 안은미와 안은미컴퍼니가 2013년에 선보일 작품은 ‘화려한 금수강산’(가제, 이하 ‘금수강산’)이었다. ‘금수강산’은 춤이 가지는 사회성에 초점을 맞추어 온 세 개의 전작을 정리하면서, 그간의 작업을 뒷받침했던 ‘몸의 인류학’에 구체성을 더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금수강산’을 준비를 하면서 초반에 생각했던 몇 가지 사안들과 아이디어들이 바뀌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것들이 재배치되면서 작품의 전반적인 모습이 바뀌게 되었다. ‘금수강산’을 받치고 있는 글(강령)에서 몇 개를 추려본다.

- “대한민국이 일제 해방이후 수립된 시점을 중심으로 한국인들의 춤이 가지는 사회적 시각과 기능을 리서치하여 영상(다큐형식)으로 제작, 전체적인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고 한국 사회의 근대성 확보에 춤이 차지한 비중을 재조명하고 탐구하고 함.”
- “전국을 방문, 춤이 그들의 삶에 미친 정서적 현주소를 집중 취재하고(···)”
- “카바레, 댄스클럽, 콜라텍, 회갑연, 마을잔치, 수학여행, 신입생환영회, 동네 체육관, 길거리, 유치원,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춤들(···)”

정리하자면, 시기는 “해방 이후”이며, 방법은 “리서치”이며, 필드는 “카바레” 등의 “춤”이 있는 곳이며, 구현 방법은 앞서 말한 3개의 작품을 관통하는 ‘몸의 인류학’이다. 이후 추상적인 논의들이 구체성과 무대에서의 현실 가능성을 입어가는 과정에서 시기는 1988년에 개최되었던 서울올림픽으로 확정되었다. 시간대가 확정되니 시간에 부대하는 공간 또한 자연스레 당연 한반도로 설정되었다.

 

소재의 뚜렷한 설정과 함께 다음 제목이 정해졌다. ‘스펙터큘러(spectacular) 88’이다. 스펙터큘러의 사전적 정의는 ‘구경거리의’ ‘장관(壯觀)의’ ‘호화찬란한’ 등이다. 역사(교과)서에 서울올림픽은 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며 쉴 새 없이 진행되던 근대화의 쾌거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그것은 조선-대한민국 근대화의 화룡정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안은미의 작품은 여기에 의문을 던지기로 했다. 흔히 역사의 발전적 구도를 정(正)-반(反)-합(合)이라 보는데, 그렇다면 정(正)에 마름질된 반(反)의 역사는 어디에 남아 있는가?(이러한 질문은 동시에 반(反)의 역사는 반드시 정(正)으로만 수렴되지 않고 어딘가에 ‘삑사리’난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을 강하게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의(大義)로서의 역사기록은 소소한 개개인의 삶의 기억을 어떻게 치워버렸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인용되는 중심소재인 88서울올림픽은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징으로 활용된다. 예를 든다면, 경기장에서 광활한 스펙터클의 연출을 위해 ‘동원’된 국민의 몸짓, 외신들의 렌즈에 담기기 위해 혹은 전 세계에 전시하고 과시하기 위해 연출된 스펙터클을 가동하는 부속이 된 올림픽의 주체들의 한 숨과 넋두리를 되짚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즉 화려한 표면 속 이면의 억압을, 마름질되고 격자화 된 존재들을 무대로 불러 한 바탕의 ‘씻김굿’을 치루는 것이다. 이러한 씻김은 올림픽의 광경에 가려졌던 이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보여주기와 감추기, 표면과 이면으로 일궈온 이 땅의 역사를 씻김해주는 것이다. 대신 정말 ‘굿’과 ‘떡’이 있는 축제와 잔치의 형식으로.

 

정리하자면 이 작품에서 올림픽은 중심소재이자, 중요한 상징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올림픽은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볼거리의 집적체 아닌가? 무대에는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살아낸’ 이들이 초대되어 춤을 출 것이다. 막춤이다. 안은미는 신명을 불어넣을 것이다. 무용수들은 흥을 돋울 것이고, 음악은 흥을 돋우기 위해 맹렬히 회전축을 돌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올림픽의 다양한 장면들이 인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비틀리며 풍자되기도 할 것이다. “만약 그 때 이랬다면 어땠을까?”라는 의문이 마구 던져질 것이다. 반듯하고 장대한 스펙터클이 이룩했던 “그 때”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이랬다”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연출하여 “그 때”를 비틀고 풍자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비트는 가운데 우리가 잊고 있던 웃음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춤’과 ‘몸’이 ‘88스펙터큘러’의 과정 전체를 궤뚫고 있다는 것.

 

춤은 어느 역사에서나 극도로 억압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적극적으로 권장되어왔던 인간의 문명물이 아니었다. 어떻게 본다면 지독히 솔직한 표현이기에 그것이 몸에 불을 지를 때, 인간의 모든 면모가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은미가, 그리고 이번 작품이 노리는 지점 또한 이것이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춤 춰본 적 있는가?

 

<스펙타큘라 88땐쓰> 

김남수(안무비평가)

 

대한민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은 1989년 세계여행 자유화 조치였다. 그 이전까지 북쪽이 벽인 섬에서 사는 신세였던 한국인에게 다시 세계 자체가 실감있게 줌인되어 접촉되기 시작했다. 세계와 분리되었다고 믿었던 몸이 세계의 몸과 하나로 겹쳐질 수 있다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와 해방 공간에서는 당연히(!) 맛보는 감각이었다. 세계와 핫라인으로 연결되어 온갖 정보와 흐름들이 이 땅에 접속 수혈되었다. 그에 따라서 한국 내부의 고유하고 독특한 문화 역시 환기되었다. 가령, 최승희의 춤이나 윤이상의 음악,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모두 자기성(한국의 버내큘러 문화)과 대타성(서구의 문화적 무역) 사이의 신체적 접촉의 감각에서 나온 것이다.

 

<스펙타큘라 88댄스>는 한국전쟁과 분단 이후 갈라파고스 섬처럼 고립된 영역에서 살면서도 기이한 돌연변이의 현상을 따라 몸과 몸짓의 새로운 문화를 꾸려운 현대 한국의 고고학적 탐사이다. 이것은 꼭 “춤”이라는 특정한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몸 쓰는 맛”이라는 보다 문화학적 차원의 것이다. 가령, 길거리를 걸어가는 걸음걸이, 미소의 타입, 바디랭귀지의 금기, 통행금지의 소동, 결혼식 풍경, 관광버스, 캬바레 일탈, 바람 피우는 당시 풍속 등등 문화의 여러 단면에서 나타나는 몸과 몸짓의 민족지학적 탐구이다.

 

이러한 탐구 과정은 결국 세계와 다시 접속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라는 신기원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 행사는 당시 폐쇄적이었던 독재국가에게 세계와 인터페이스를 갖게 되는 일대 사건이었으며 역설적으로 추진주체의 바람과 달리 민주주의 역시 탄력을 받게 되는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행사의 실제 과정은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이라는 초상, 즉 굉장히 미니멀하면서도 에스닉한 광경을 통해 독재의 마스게임이 지향하는 스펙타클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게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즉 그리스의 “전차” 수레바퀴, 인도의 “윤회” 수레바퀴, 중국의 “노장” 수레바퀴 등등 각각 축이 되는 문명의 기원을 건드리며 몸과 몸짓의 한국적 기원을 제출하는 방식을 택했다.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지는 몸의 충동.

 

동아시아에서 “스펙타클” 개념은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가 공격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물신적 기제가 아니라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관계의 리듬을 구하는 인간의 운명을 유동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88올림픽의 집단적 군무는 대단히 스포츠의 리니어한 모델이었지만 동시에 기운이 엇박자의 신선한 싱코페이션의 감각으로 솟구치는 한국인들의 춤의 감각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이 폐막식의 <떠나가는 배>에서 심청의 인당수에 빠지기 직전에 보는 초자연적인 비전의 세계로 연결되는 것은 다분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스펙터클”은 자신의 힘이 아닌 타입으로 초자연적인 비전을 보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처럼 <스펙타큘라 88댄스>는 지난 40년 전 압축근대화의 일관공정 속에서 비인간의 대접을 받으면서도 타고난 생명력을 불태운 여공의 몸짓에서부터 꽃이 피어 꽃구경 가는 유한한 시간 동안 누리는 유흥의 몸짓, 더 많은 인간적인 얼굴과 인권,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저항의 몸짓 그리고 삶의 지난한 과정 속에서 시간의 선물처럼 익어가는 주름의 몸짓에 이르기까지 모두 받아들이는 동시에 1988년을 기점으로 세계와 다시 살가운 접촉 속에서 촉각적이며 리듬적인 몸, 몸짓이 재설정되는 과정까지도 함께 담아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