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미의 춤과 대구 – 대구시절을 기억하다 – 홍종흠

안은미의 춤과 대구

-대구시절을 기억하다

 

홍종흠(전 대구시문화예술회관장)

 

  무용가 안은미가 대구와 본격적인 인연을 맻은 것은 2000년대초 약4년간으로 기억된다. 그의 고향이 영주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대구를 방문한 적은 있을지 모르나 자신의 전문직인 무용으로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그의 일생에서 이 때를 대구시절이라 할 수 있고 그 시기는 단순한 활동장소의 의미 보다 예술인생을 성숙시킨 중요한 구간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나는 대구시문화예술회관장으로 2001년 4월부터 2006년 8월까지 근무하는 동안 2000년 12월부터 2004년 7월까지 대구시립무용단감독으로 재직했던 그와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한 직장의 동료였다. 그 무렵 대구시문화예술회관은 무용단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등 7개의 예술단체를 시립으로 운영하고 있었고 각 단체의 감독을 시문화예술회관에서 뽑아 해당 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특히 그때의 대구시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면서 초대 민선시장으로 선출된 문희갑시장이 대구의 발전을 위한 사업으로 문화예술을 시정(市政)의 최우선 역점분야로 지정 행정력을 집중했다. 시재정의 특별지원은 물론 인사에서도 다른 지자체와 차별화되는 시책을 펼쳤다. 그 때까지 공무원만 임용해왔던 문화예술정책의 집행기관인 문화예술회관장 자리를 전국에서 처음으로 민간인에 개방했고 각 장르의 예술 감독은 세계적으로 기량을 인정받는 예술인들을 선발했다.

 

  대구시립무용단은 당시 전국의 광역자치단체로는 유일하게 현대무용만을 공연하는 단체로 운영했기 때문에 대구가 자랑스러워하는 예술단체였고 다른 지역에서도 그 위상을 인정받았었다. 대구는 보수성이 강한 도시였기 때문에 문화예술행정은 예술을 통한 진보와 실험 등으로 변화의 도시, 진취적 도시로 바꾸려는 의지가 강했고 예술분야에 거는 기대도 컸다. 특히 현대무용은 예술의 성격상 시민들의 정서를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았다. 시립무용단 예술 감독의 선발에 특별한 관심이 쏠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은미는 새천년이 시작되는 첫해에 이 같은 시민의 정서와 지역 지도층의 기대를 안고 선발된 것이다. 대구에 오기 전에 그의 활동은 대중적으로 넓게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무용계에서는 미국에서 활약하는 젊은 무용수로 촉망받는 인재로 소문이 나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예술인이 빡빡머리로 활동하는 경우가 없었고 나신으로 춤을 추는 무용수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그에 대한 소문은 무용의 기량 못잖게 특별한 화제가 되었다. 이 같은 화제는 일반인은 물론 무용계에서도 많은 논란이 되었고 대구시립 감독으로 어떤 이슈나 문제를 만들어 낼지 구구한 억측도 따라 다녔다. 그런 그가 시립감독으로 임명된지 4개월 뒤 내가 예술회관장에 취임하면서 그와 첫 상면이 이루어졌다.

 

  빡빡 깍은 민머리의 젊은 여성이 무당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옷차림에 흔히 볼 수 없는 각종 장식을 한 기이하면서도 깜찍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첫 인상은 소문으로 듣던바 보다 더 강한 인상을 주었다. 동시에 이 사람이 무언가를 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조심스러움은 있었다. 그러나 비구니 승려의 경우도 구도자가 되는 결심의 징표가 삭발인 것을 생각하면 예술인으로서 그의 마음자세가 특별할 것이란 짐작에서다. 그래서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이 “왜 머리를 깎았느냐?”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이같은 질문을 수없이 받았던 듯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 때의 기억으로는 젊은 무명의 무용인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봤자 세상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못하는데 젊은 여인이 머리를 깍고 도심을 활보하고 무용을 하면 당장 유명해질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실제 그같은 효과를 보았다고 했다. 또한 여성의 여성다움과 여성미를 드러내는 데 가장 중요한 머리카락을 잘라낸다는 것은 더 이상 여성성이나 여성미의 걸림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누리고 그 같은 자유를 바탕으로 춤예술의 창의를 추구한다고도 했다. 그런 설명으로 그의 빡빡머리를 새로 보게 되었고 그 후에도 내가 그를 대하는 인식의 기저에는 그의 자유정신이 내내도록 떠나지않았다.

 

  부임 첫해의 정기공연으로 상반기에 ‘대구별곡’,하반기에 ‘성냥파는 소녀’를 무대에 올렸는데 대구의 무용계는 물론 전국적으로 현대무용계의 눈이 이들 공연에 쏠렸다. 뉴욕에서 성가를 날리던 그가 한국에서 어떤 춤을 만들어낼지 한껏 궁금증이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첫무대를 소개하는 팜푸렛 사진에 당시로선 사고라면 사고라고도 할 수 있는 문제가 생겼다. 그 사진은 무용수들의 앞가슴이 드러난 공연장면을 담은 것이었다. 예술단의 행정을 맡은 직원이 나에게 와서 이 팜프렛을 그냥 내보내면 언론과 무용계, 시민들로부터 매우 부정적 비판과반발을 쌀 우려가 있다고 했다. 무용감독과 예술회관이 곤경에 처할 것이라며 이를 고쳐서 제작하고 실제 안무에도 앞가슴이 드러나지 않도록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연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나로서는 우선 안감독을 만나서 걱정스럽다는 말과 함께 사진의 장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물었다. 그의 주장은 공연 내용이 예술작품으로서는 문제가 없고 팜프렛을 고칠 수 있는 물리적 시간도 충분치않다고 해서 공연후에 생길 수 있는 문제는 내가 책임지기로 하고 계획대로 진행시켰다. 그랬더니 공연이 끝난 후 기자들이 내 사무실에 몰려와 무용수들의 나신무용의 문제를 따졌고 무용계에서도 일부 인사들이 심각하게 항의했다. 심지어 일부 무용인은 여성무용수의 벗은 몸으로 관객 앞에 나선 것은 안은미 무용의 저속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품위문제 마저 제기했다. 그러나 나도 평소 예술과 외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 터라 그들에게 안은미 공연에서 예술작품을 감상했다는 생각 보다 성적 자극을 느꼈는지 물어 보았다. 그리고 옷을 벗은 무용수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그렇게 강제되었다는 항의나 원성을 들어보았는지도 물어보았다. 이 같은 질문에 성적 자극을 받았거나 무용수의 항의를 들었다는 사람은 없었다. 품위문제를 제기한 사람에게는 몸의 예술을 하는 무용인의 작품에서 옷의 유무가 반드시 작품의 질과 품위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는지를 되물었으나 그들은 제대로 답변을 하지못했다. 그렇게 그의 첫 무대는 쇼킹한 화제를 일으켰지만 이전까지 대구에서 보지못했던 전위적 작품 정도로 이해되면서 순탄하게 넘어갔다.

 

  그의 작품은 몸의 표현을 자유롭게 한 것 외에도 안무의 과정에 서사적인 전개를 삽입함으로써 당시 우리사회에 뮤지컬이 뜨던 시대적 배경에 넌버벌의 댄시컬을 시도한 것이다. 음악중심의 극에서 무용중심의 극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때로는 무용이 오락과 결합하는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노소와 빈부, 학력차이 등을 불문하고 많은 관객이 재미를 느끼며 무용공연을 보게 된 것이다. 이같은 무대를 만들면서 이전까지 관객동원이 어려웠던 무용공연에 관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실 무용은 이해하기 어렵고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사람들만 보는 예술로 여겨왔던 많은 대중들이 우리도 무용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관객이 늘면서 지역의 큰 기관과 단체들이 무용표를 사기 시작했고 그것이 시민들의 문화생활에 자리 잡는 새로운 현상이 생겨났다. 

 

  무용단이 신바람이 나면서 무용단의 단원들도 안은미 따라 하기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무용단 단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여러 명이 안은미와 같이 민머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안감독이 머리를 깎으라고 시켰는지 물었는데 그들은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판단대로 했다지만 미심쩍어 안감독에게 머리를 깎으라고 시켰는가 물었지만 역시 아니라고 했다. 나는 여성들의 머리형문제는 인권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무용단원 전체를 모아놓고 타의에 의한 삭발은 어떤 경우든 허용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물론 그 뒤에도 이 문제로 아무런 말썽이 없었던 사실을 미루어 보면 단원들의 빡빡머리는 안은미 따라 하기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장르의 감독들에 비해 나와는 많은 대화를 나눈 편이었다. 첫 정기 공연부터 가슴을 드러낸 무대로 대화의 계기가 만들어져 자주 얘기를 하게 되었지만 행정경험이 없었던 안은미가 감독직을 맡아 여러 면에서 서툰 점이 많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대화내용은 무용단 운영에 대한 사무적인 문제를 비롯 자신의 예술관과 단원들의 교육 등에 대한 내용들이 주된 것이었다. 한번은 신문공부를 하자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물었다. 무용가가 신문을 읽고 공부하겠다니 엉뚱한 생각이 들어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무용단원들이 사회를 너무 몰라 제대로 안무를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전까지 무용단의 교육내용은 춤사위의 연습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는 단원들에게 사회공부, 세상공부를 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 신문을 읽고 공부하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진 식견대로 신문공부에 대한 조언을 했지만 그의 주장은 춤이나 안무가 세상과 동떨어질 수 없고 그런 지식이나 정서가 쌓여 몸으로 표현된다는 것이었다. 그 뒤 그가 안무한 춤 가운데 막춤 등 여러 안무에서 춤의 사회성 등을 엿볼 수 있었다. 춤사위의 기능적 측면 보다 춤사위에 녹아있는 역사성, 사회성 등의 의미에 더 큰 무개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춤이 단순한 육체적 기능성에 제한되기를 거부하고 자유정신을 바탕으로 한 창의정신이 그 시대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춤속에 녹여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였다.

 

  안은미가 안무작업을 할 때는 특별한 프로정신을 실감하게 된다. 평소 자유스럽고 여유로운 그의 생활태도로 미루어 보아 작업자세도 느슨할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안무와 관련된 모든 부분에서 꼼꼼하고 치열하게 챙겼다. 대체로 무용감독을 맡은 안무자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춤을 추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는데 그는 거의 모든 자신의 작품에 출연해 혼신의 노력으로 춤을 추었다. 춤뿐만아니었다. 평소 예술회관에는 전문적인 전속 조명기사가 상주하면서 무용작품에는 특별히 핀조명 등 세심한 배려를 했었다. 그러나 안감독은 전속기사의 조명에 만족하지않고 조명푸로그램 등 조명의 실제적 문제에 자신의 생각을 꼼꼼히 실무적으로 반영시키는 열정을 보였다. 의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기획하는 작품에 맞는 의상을 제작하는데 예산이 모자라거나 의상제작자의 기술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대구에서 가장 큰 서문시장에서 천을 직접 구입해서 자신이 자체제작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이 입는 옷도 이같은 방식으로 만들어 입기도 했다. 아마 이런 안무자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안감독의 대구시립 재직 시 지역에서 세계적 체육행사가 두 번 열렸고 그 때마다 개폐회식의 식전문화행사가 문화계의 큰 관심사였다. 2002년-2003의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개폐회식의 안무와 2002년 월드컵 대구경기 오프닝 식전안무를 그에게 맡기면서 그의 기량을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세계에 전파를 타고 한국의 문화수준을 알리게 될 식전문화행사 안무는 전국의 문화예술계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안무를 대구에서 맡은 이상 대구의 문화예술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 안은미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들 세계적 행사는 열리는 장소가 대구였을 뿐 총괄지휘는 문화체육부가 맡았기 때문에 서울의 문화계인사들에게 기회가 주어지기 십상이었다. 당시 안감독이 안무를 맡은 것은 그의 능력이 인정받은 측면도 있었지만 그 보다 지방자치제에 따른 대구시의 강력한 요청에 힘입은 바 컸다. 처음 문체부의 계획으로는 대구의 문화계가 배제되다시피 했는데 문화예술회관의 항의로 대구의 문화계가 뭉쳐 이를 관철시켰다. 이 때문에 안감독 안무의 성과는 대구 문화계의 성공과 실패를 담보하는 무거운 책임이 따랐던 것이다. 이들 행사에서 안감독의 안무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넘치는 에너지로 관객들의 열광적 환호를 받았고 대구의 문화적 기량을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 안감독이 두 차례의 세계적 행사에서 식전안무를 모두 맡은 것은 첫 번의 개막식 행사부터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구시립의 감독으로 있는 동안 정기공연이나 대구시 행사에 많은 열정을 쏟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국내외 다른 공연에도 많은 활약이 있었다. 영화에도 출연해 예술 활동의 영역을 넓혔다.

 

  몇 차례 공연 관련 유럽여행을 하고 온 2004년초 어느날 그는 갑자기 시립감독직을 그만 두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의 임기가 아직 1년 정도 남은 터라 후임을 생각할 때도 아니었고 통상 시립감독직은 경제활동이 불확실한 예술인들에게는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감독직을 스스로 물러난 경우가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예술회관이나 나에 대한 불만이 있어 그러는지 몰라 “왜 그만두려하느냐?, 다른 자리로 갈 기회가 생겼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엉뚱했다. 다른 자리로 가려는 것은 아니고 현재로서는 그만 두면 소득이 생길 데도 없다는 것이었다. 무작정 그만 둔다는 것이다. 그만 두는 이유는 여기에 월급쟁이로 매여 있다가는 예술인생이 망가질 것같아서 라는 것이다. 내가 그의 예술활동에 간섭하지는 않았지만 시립예술단이 관립체제였기 때문에 따라야할 규율이나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창의적 활동에 장애가 된다는 뜻이었다. 사실 시립예술단 감독직은 많지는 않지만 일정 소득을 보장받으면서 자신의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조건 때문에 푸로예술인들이 대부분 선호하는 자리였다. 더욱이 나는 남은 임기까지 그에게 돌발적 사임사유가 발생하지않는 한 그동안의 활동 실적으로 보아 임기를 연장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차례 사임을 만류했지만 뜻을 굽히지않아서 이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혔다.

 

  경제적으로 어떤 곤경에 놓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련 없이 직장생활을 훌훌 털고 나선다는 것은 그가 머리를 깎고 세상에 나섰던 마음과 맞닿아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출생과 함께 세상에 던져졌을 때 허망한 시공에서 마주쳤던 대자유로 불안감 없이 돌아갈 수 있는 준비된 마음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금 안은미의 대구시대에 보았던 자유로운 예술 혼을 떠올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