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미-백남준 결혼식 – 서현석

<안은미-백남준 결혼식>

서현석

 

백남준아트센터가 선정한 예술가상의 수상자로서 안은미가 기획한 시상 퍼포먼스는 백남준에 대한 헌사이자, 백남준과의 영혼의 결혼식이다. 백남준아트센터의 앞길에서 진행된 이 제식은 24대의 기중기에 매달린 피아노떼의 아래에서 진행된다. 안은미컴퍼니의 무용수들의 ‘들러리’ 무용에 이어 신부복을 입고 등장한 안은미는 신랑인 백남준과의 영적인 결합을 위해 백남준이 196*년에 행했던 퍼포먼스를 재연한다. 백남준이 퍼포먼스 중 자신의 ‘영적’ 지주였던 존 케이지(John Cage)의 남근을, 아니 넥타이를 잘랐던 것처럼, 안은미 역시 가위로 넥타이를 싹둑 자른다. 그런데 그 넥타이는 타인의 목에 걸려 있지 않고, 자신의 드레스에 달려 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다. 가부장의 권위의 상징이 자신의 치맛자락에 주렁주렁 달렸다. 마치 자신이 먹어치운 징표로 사오정이 몸에 매달고 있는 무수한 인간 희생자의 해골들처럼, 문맥과 사회적 상징성을 거세당한 넥타이들이 개체성을 잃고 장식적 패턴의 일부로 전락하여 전람된 것이다. 주위에 몰려든 동네 아이들에게 엿을 나누어 주는 엿장수라도 되는 듯, 안은미는 가위로 넥타이를 가위로 싹둑싹둑 절단하여 관객들에게 나누어준다. 안은미에 의해 백남준의 사디즘적 행위는 행위자의 신체로 귀환, 자기애적이고도 마조히즘적인 단상으로 전환된다. (마조히즘은 나르시시즘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외부의 대상으로 투사된 공격성이 내면으로 내사되는 현상이 곧 마조히즘이라는 프로이트의 설명*을 몸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말이다. 이 단순한 주객의 전도가 야기하는 파격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타성과 권위를 훼손하는 백남준식의 공격적 전복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후한 ‘베풀기’의 정서로 승화된다. 유아적 박해가 유희적인 박애로 대체된다.

 

역사에 대한 재연은 공기관의 단순한 기념행사로 그치지 않고 역사에 대한, 역사 쓰기에 대한, 일련의 질문들로 확장된다. 하나씩 잘리는 넥타이는 하나의 질문이 되어 관객들에게 주어진다. 백남준의 행위는 오늘날 그의 모국인 한국에서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가?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일방적인 수용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형태로 거리를 둘 수 있는가? 오늘날 한국인에게 백남준은, 모더니즘은, 무엇인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위질의 반복으로 인한 가장 큼직한 변화가 있다면, 바로 무수한 역사적, 미학적 상징성들의 총체적인 와해일 것이다. 결국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무료 급식 같은 헤픈 ‘베풀기’를 계속함으로써 안은미는 행위 자체의 의미를 즉흥적인 놀이로 융해시킨다. 불손함의 진중한 무게를 사소한 가벼움으로 변환한다. 역사 속의 묵직한 상징성은 ‘지금’ 속의 즉각적인 공허함이 되어 허공으로 승천한다. 행위(action)는 몸짓(gesture)이 되어 날개짓한다.  

 

인류애와 구원의 메시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안은미의 간단한 도치는 분명 타자의 정치학에 귀속된 모더니즘의 고질적인 콤플렉스를 시원하게 해소하고 대체하는 나름대로의 유연한 초월성을 머금는다. 만약 백남준의 작품 세계가 서구의 아방가르드 미술의 기반에 깔린 문화적 타자로서의 동양 사상에 대한 낭만적 침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에 대한 냉소적 성찰이자 모성적 포용을 형상화한다면, 바로 이런 몸짓이 되리라. 안은미의 퍼포먼스가 (무당의 작두처럼) 예리하면서도 (무당의 춤처럼) 경쾌한 이유는 이와 같은 양면적 기능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안은미의 몸짓은 백남준의 풀리지 않은 한을 시원히 날려주는 살풀이춤이다. 백남준을 얽매던 남성적 딜레마를 해결해줄 자가 있다면, 가부장적 모더니즘의 역사적 콤플렉스를 해소시켜줄 수 있다면, 그 역할에 어울리는 단어야말로 ‘영적인 아내’가 아니겠는가. 안은미의 ‘결혼 놀이’는 여성적, 이국적 타자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모더니즘의 장애적 위상에 대한 조롱이자 치유이며, 너그러운 동참이기도 한 셈이다.  

 

<안은미-백남준 결혼식>은 피아노를 도끼질한 백남준의 행위를 재연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퍼포먼스의 말미에서 안은미는 피아노에 대한 백남준의 배타적 폭력성을 중력에 맡긴다. 기중기에 메달아 놓고 끈을 끊어 추락시키는 것이다. 백남준의 무대화된 ‘피아노 부수기’가 부르주아의 타성을 타격하기 위해 “피아노를 때려 부수라”라 했던 트리스탄 자라(Tristan Tzara*)의 외침에 대한 패러디 같은 메아리였다면, 안은미의 피아노 부수기는 백남준의 메아리를 또 한 차례 순환시키고 공명시킨다. 패러디의 패러디라는 이중 부정은 원래의 파격을 복원할 수 있을까? 기중기에 매달려 있던 피아노는 역시 기중기에 매달려 허공에서 가위질을 하는 안은미에 의해 보도블록 위로 곤두박질 쳐진다. 수백 명 관객들의 귀와 눈은, 하나의 둔탁하기 이를 데 없는 굉음, 그것의 발원지인 한 평 남짓한 낙하지점으로 집약된다. 추락한 피아노의 괴력은 파장을 일으키며 대기로 확산함과 동시에, 산재되었던 객석의 에너지를 하나의 시공간적 일체감으로 응집시킨다. 감각에 대한 공격은 상징적이기도 하면서 즉물적이기도 하다. 즉물적이기에 그 상징성은 더욱 크게 공명한다. 전통에 대한 백남준의 공격이 돈키호테의 무모한 ‘도전’이었다면, 안은미의 가위질은 탯줄을 끊는 모성적 ‘출산’에 가깝다고나 할까. 더 이상 모더니즘의 충격이 솟아날 수 없는 오늘날의 제도화된 미술계에서 그나마 성립될 수 있는 파격이 있다면, 역사의, 역사에 대한, 역사에 의한, 마주침이 아닐까. 백남준아트센터의 김남수 학위실장*의 표현대로, 피아노의 추락은 피아노처럼 생긴 ‘백남준아트센터’의 모순적인 제도적 위상에 대한 직격탄이기도 하다. 피아노가 추락할 장소가 경기도의 공적 재산인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가 아닌 백남준아트센터의 사적 공간이었어야만 했던 행정상의 한계는 그러한 면에서 오히려 의미심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