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미+어어부 프로젝트 “서울특별시에는 도망치는 미친년과 어부 잡는 물고기 아빠가 산다” – 이정우

2003-06

안은미+어어부 프로젝트

“서울특별시에는 도망치는 미친년과 어부 잡는 물고기 아빠가 산다”

 

임근준 AKA 이정우 _ 미술·디자인 평론가

 

 

도망치는 미친년

낯익은 자세로 들어 찬 집들이 만드는 낯설고 좁은 골목길을 홀로 걷는다. 어디선가 이상한 음악이 들리고, 이내 모퉁이를 돌아서자, 웬 미친년 하나 나타나 웃고 서있다. 한눈에 봐도 동자귀신 들린 미친 여자다. 여자는 성대 없이 깔깔대더니 춤을 추기 시작한다. 춤을 추며 네 이눔 따라오너라 손짓한다. 야릇한 명령이다. 나는 주저한다. 인적 없는 곳에서 귀신에 홀리면 죽는다던데. 하지만 나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춤을 추어대는 저 미친년의 얼굴은 미륵보살 같기도 했다가, 무작정 상경했다가 서울서 험한 꼴보고 넋을 놓쳐버린 미친년 같기도 했다가, 영 종잡을 수 없다. 아니, 식모살이 그만두고 공장에 다니다 골병이 들었다는, 눈물 흘리며 집 떠나간 내 어릴 적 유모 같기도 하다. 나는 그만 미친년의 춤을 멈추게 하고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저이가 정말 유모일까? 

 

내가 주저하는 발걸음을 내딛으며 다가서자, 저년, 춤을 추며 달리는 것인지, 달리며 춤을 추는 것인지, 신기하게 빨리도 멀어진다. 나도 홀린 듯 좇아 발걸음을 재촉한다. 아니, 냅다 뛰어도 본다. 이어 오른손을 내뻗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미친년의 빨간 드레스. 이 골목길은, 내가 달리는 동안, 스크린에 둘러 쌓인 거대한 러닝머신이라도 되어버린 것인지, 아무리 힘써 달려 보아도 코앞의 저년은 결코 손에 닿질 않는다. 아, 씨발 대체 저년은 누구란 말이냐.

 

얼마를 뛰었을까, 좇다 지쳐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데, 미친년 내 가까이 다가와 내가 마치 뵈지도 않는다는 듯 표변하여 정색을 하고 춤을 춘다. 그 몸짓은 기록영화에서나 보았던 이사도라 던컨 같다가도 또 갑자기 가짜전통을 대량생산했던 최승희 같기도 하다. 내가 배구자를 잠시 떠올리자, 저년이 독심술이라도 배웠는지 검지를 까닥까닥 메트로놈 마냥 흔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름다운 걸음걸이와 몸을 버티고 서는 발의 모양새는 영락없이 이매방 같은데, 또 척추를 놀리는 꼴을 보아하니 이건 윌리엄 포사이드 같질 않은가. 다시 까닥대는 검지.

미친년,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며 춤을 추는데, 나는 이러다 놓치면 어쩌나 싶어 두려움도 잊고 힘을 내어 좇아간다. 갑자기 용을 써서 그랬을까, 눈 앞이 아른거리고 머리가 어지럽다. 환영의 환영일까, 나는 87년, 길거리에서 마주쳤던 이애주의 광기를 본다. 무대에서의 이애주 말고, 바로 그 신들렸던 거리의 이애주 말이다. 아뿔사, 저년이 스크린이로구나.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골목길은 죄다 가짜로구나. 돌아서면 골목은 사라지고, 새로 내딛을 골목은 저년이 춤을 추어 지어내는 것이로구나. 저년은 귀신이다- 하고 생각하는 순간, 미친년 냅다 인사를 하고 사라진다. 나는 박수를 치고 앉았다.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들린다. 집단최면이던 것이다.

여러층의 안은미

내가 보았던 안은미의 몸말은 내 머릿속에 골목길의 판타지로 남았다. ‘춤추는 미친년’이 낯선 골목으로 날 오라 유혹하는 판타지. 이 판타지에서 나는 묘한 타자를 마주하는 셈인데, 그 타자는 바로 우리 남한사람 거의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바로 그 ‘일반개념으로서의 미친년’이다. 그 ‘미친년’은 ‘특수개념으로서의 미친년’이 아니라 바로 ‘심리적 공공장소로서의 미친년’이란 말이다. 사실 그 타자는 좀 묘한 것이어서 실제로 우리가 ‘특정한 미친년’을 보게 되어도 우리는 우리 두 눈앞에 물리적으로 실존하는 바로 그 여자를 보지 못하고 우리가 체득하고 있는 ‘심리적 공공물로서의 미친년’을 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미친년’과 대화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돌을 던지거나 아니면 아예 보지 못한 척 하기 십상이다. 그렇게 ‘특정한 미친년’은 타자의 영역에 봉인됨으로써 각 개인의 심리적 스크린이 되고 사람들의 뇌수를 하나로 연결시킨다. 그러한 ‘미친년’의 스크린을 하나로 모아 부리는 몸이 바로 안은미의 몸이다. 그 몸은 묘하게도 개발독재시대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덩달아, 역설적이게도 그 시대의 주눅든 몸들마저 연상시킨다. 하지만 안은미의 몸에는 ‘미친년’의 스크린말고도 여러 층의 투명, 반투명 레이어layer가 겹쳐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이 안은미에겐 최고의 무기이자 최악의 짐이다.

그의 몸에 겹쳐진 레이어 가운데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토착vernacular/모던modern/모더더니스트 표상으로서의 최승희다. 그가 구사하는 몸말의 몇몇 요소들은 명백한 가짜전통무용의 그것이다. 최승희를 기준점으로 풀어낸 전통무용의 메타언어들은 깨나 의미심장하다. 대량생산된 전통으로 먹고사는 진정한 모던 댄스의 영역인 한국전통무용의 당대적 서사를 조준하는 강력한 알레고리를 구축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안은미의 춤에서 에릭 홉스봄이 춤추고, 가야트리 스피박이 춤추는 것을 본다. 이 레이어는 사실 첫 번째 레이어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것으로 어쩌면 동일한 것일 수도 있다. 동일한 레이어임에도 시점의 차이에 의해 다른 두 가지 레이어로 인지되는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두 레이어는 서구백인들의 시점에서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백인들에게 첫 번째 레이어는 그저 알쏭달쏭한 귀여운 광기로 독해되기 십상이어서 종종 안은미의 무용을 ‘부토舞踏에 대한 한국 무용수의 화답’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반면 두 번째 레이어는 최승희라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을 떠올리지 못하는 서구백인이라 해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성격의 것으로, 1990년대 뉴욕의 평단이 안은미에게 크게 매력을 느꼈던 점은, 아마도 토착/모던/모더더니스트의 위계를 드러내고 다시 뒤섞는, 이 두 번째 레이어에서 발휘되는 위력이었을 것이다.

 

세 번째 레이어는 바로 봉건/대량생산된 전통/모던 댄스의 위계와 합작을 무너뜨리는 1990년대적인 몸이다. 남한 사람들의 몸에 대한 관념의 기저가 통째로 변환되어가던 1990년대, 안은미의 춤추는 몸은 역사적 육체의식의 스크린으로 기능하며 종전의 춤추는 몸들이 만드는 역사에 새로운 마디를 만들며 새로운 가지를 뻗어나갔다. 안은미의 1990년대적인 몸은 껍데기가 한껏 부풀은 과잉의 몸으로서, 화수분처럼 +는 넘치되 -는 결핍된, 알고 보면 ‘완전한 공허’인, 탈식민 시대의 유색인 육체를, 그리고 그것이 처한 공황상태를 정확하게 지목했다. 내가 처음 안은미의 춤을 보았을 때, 나는 부풀은 나의 껍데기 안에서 무언가 요란스레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흔적기관처럼 남아 가끔씩 달그닥 거리는, 자라다가 그만 갑자기 화석이 되어버린 모더니스트의 머릿돌이 심하게 흔들리는 소리였다. 그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격자의 질서이고, 또 언제나 자력을 잃지 않는 소실점의 나침반이기에, 흔들리기라도 하면 몹시 아픈 법이다.

 

네 번째로는 골목길, 즉 새로이 도망칠 공간spielraum을 아슬아슬하게 생성해내며 도망치는 기호조작사記號造作師로서의 몸을 꼽을 수 있다. 어쩌면 앞으로 가장 중요한 실험은 여기에서 나올 지도 모른다. 안은미의 몸에는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조합을 새로이 엮어내며 다중의 관계기호conjuncture를 가지고 노는, 마술적 권능이 숨어있다. 허나 이 작업은 홀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되었건, 현대미술가가 되었건, 반드시 누군가와 공동으로 작업해야 성취할 수 있는 성격의 과제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춘향에서의 작업에 대해 만족해하는 작가의 얼굴에서 커다란 기대감을 얻는다. 앞으로 이 게임메이커로서의 레이어가 어떠한 기능을 하며 자라나갈지 궁금하다.

 

다섯 번째로는 셀레브리티로서의 레이어를 꼽겠다. 여태껏 남한의 무용가들은 국위선양의 육체이거나 서양인의 육체를 원격모사해내는 초점 안 맞는 싱글채널모니터였을 뿐, 한 번도 대중문화의 즉자적인 숭배대상인 셀레브리티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다. 허나 199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발흥의 축복을 받은 안은미는 처음으로 영화적 육체로 춤추는 무용수가 되었다. 그것은 관객에게 남다른 감흥과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안은미가 유명영화배우와 스캔들에도 시달리고, 영화에서 주역도 맡는 등, 더욱 연예인다운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몸이 진정한 셀레브리티의 몸으로 변해버려서, 연예인적 육체가 내 두 눈앞에서 춤추는 마법적 상황을 기대하는 것이다.

 

사실, 처음 안은미의 공연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여자, 몹시 약았구나 싶었다. 1990년대가 농익어가던 무렵의 안은미는 모든 1990년대의 존재들을 부리는 동시에, 먼지 속에 묻혀있던 역사적 육체들을 소환해 자유자재로 소비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뉴욕과 서울이라는 물리적, 문화적 차이와 위계를 단숨에 틀어쥐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든 요사스런 마음부림은 치밀한 계산과 의도와는 상관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작 안은미를 만나 이야기해보니, 이 여자는 어려서 전통무용을 배운 촌년이라 나의 독해는 창조적 오독이었을 공산이 커졌다. 그럼에도 그 기형-건축적 기호놀이는 여전히 제대로 작동한다. 자연스럽게 우러난 기호놀이라니 그저 더욱 기이할 따름이다. 그리고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의도한 바이건 의도하지 않은 바이건 크게 신경 쓸 바는 아닐 수도 있다. 신경이 쓰이더라도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쳐두자. 오묘하게 축성된 기이한 소실점의 영혼이, 미친년과 탈식민의 약한 고리 따위로 변신하는 마법육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당분간 안은미의 주술적 몸말은 계속될 것이니.

물고기가 노니는데, 아빠가 고기를 잡고, 고기를 잡으니 물고기가 아빠- 한다. 나는 어부 잡는 고기인가 고기 낳은 아빠인가.

아주 특별한 소리가 달팽이관에 잠입하면 무척 어두운 골목길이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걸음은 절로 떼어지고, 살짝 어지러울 정도로 상하고저上下高低의 변화도 동반된다. 영원히 해가 지는 골목길은 종종 동굴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나는 갑자기, 육 면이 가로막힌 방 한가운데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천장에선 갑자기 무시무시하고 슬픈 기억들이 뚝뚝 떨어진다. 뚝뚝 떨어지는 기억 너머로 웬 잘생긴 남자를 본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

 

참기 어려울 지경에 도달하기 전에 소리는 다시 방을 허물고 골목 혹은 동굴의 시뮬레이션을 제공한다. 조금 걷거나 미끄러지다 보니, 나는 다시 낯익은 방에 서있고, 이 방에서는 가끔 랭보처럼 말하는 지나치게 건장한 남자가 이상한 말을 건네더니 고개를 숙인다. 남자가 죽었나싶어 건드려보니 삽시간에 개파리 들끓고, 다시 나는 길을 걷고 있다. 이번엔 골목의 스케일이 욕지기나도록 커졌다 작아졌다 반복되고 나는 이내 웩- 하고 토하고 만다. 어, 씨발- 하고 욕이 나오려는데, 내가 뱉어놓은 토사물에서 슬슬 무언가 자라나더니 아까 그 남자의 모양을 갖추어나가는데, 이게 폼 좀 잡으니까 다시 육 면이 가로막힌 보랏빛 방이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커다란 방인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베이스 추임새에 맞추어 이 남자가 육자배기를 때리니 갑자기 여의도 공원이다. 어머나, 하는 순간에 다시 방안이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리는 1980년대 신스팝이다. 이게 다 뭔가 싶어 남자를 골똘히 살펴보니 이 남자 뒤의 어둠 속에 다른 남자가 있다. 영리하게 생겼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자는 결코 얼굴을 내보이는 법이 없다.

 

보랏빛이 다 시들어버리니 다시 동굴인데, 동굴바닥을 얼굴 내보이지 않는 남자가 풀어놓는 다양한 박자를 타고 쭈욱- 미끄러지다 보니 또다시 어두운 방이 나온다. 다시 육 면이 가로막힌, 그러나 천장이 아주 높은 길쭉한 방인데, 이 방의 벽은 무척 물컹거리고 짙은 핏빛이다. 바닥을 밟을 때마다 냄새나는 사연이 기어 나오는데, 그 사연 들어보니 레지 김양을 상습 구타하던 옆집 아저씨의 흩어진 뇌수 조각이다. 놀라서 뒤로 나자빠지니 다방이 어항 속에 있고, 다방 속에 어항이 있는데, 금새 김양이 진술을 마쳐버리니 다시 골목길이다.

 

잠시 생각해보니, 내가 골목을 걷는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잠시 홀린 것 같은데, 이렇게 교묘히 사람 홀리는 남자들의 수법을 보아하니 이렇다. 어둠 속에서 소리의 뼈를 흘리는 남자가 소리의 튜브를 자라나게 하는데, 이내 건장한 남자가 그 안으로 미끄러져 흐른다. 실험실 배양액에서 길러낸 것 같은 이 남자는 랭보처럼 말을 하는데, 말을 하기 시작하면 고치가 자라나 방이 되어버린다. 각 방은 독특한 혀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데, 이 법칙에는 소리의 뼛조각이 있어서 함부로 자라난다. 자라나는 모양은 언제나 다른데, 척추로 자라는 법은 결코 없다. 언제나 시작은 작은 소리조각이다. 종종 살이 붙고, 커지기도 하는데, 작은 것도 많으며 기형을 타고난 것도 있다. 어쩔 때엔 함부로 자라난 소리의 뼛조각이 가슴에 와 박히거나 뒤통수에 날아와 꽂히기도 하는데, 그러면 애인이 젖꼭지를 깨물었을 때처럼 꼬리뼈가 선명해지고, 기분이 너무 좋아 낄낄거리다가 잠시 핑계 없는 눈물을 흘리고, 결국 곱게 머리를 빗어 내리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오래오래 걷다보면 소리의 뼈를 흘리는 남자의 소리의 뼈와 랭보처럼 말하는 건장한 남자의 방을 지배하는 법칙에 들어있는 소리의 뼈가 일치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그러면 어두운 골목의 벽이 갈라지고 현실의 빛이 새어 들어오게 되는데, 그러면 환상이 깨지고, 쾌락이 급감하여, 지독한 두통이 엄습한다. 엄청난 숙취에 시달리는 듯 고통스러운 가운데 다시 질척한 방안에 갇히게 되면 고향에 돌아가긴 영 글러먹은 중국인 자매를 만나게 되는데, 이번엔 중국인 자매가 랭보처럼 말하는 남자임이 다 들통 나고 만다. 벽 틈으로 들어오는 비루한 일상의 빛이 산통이 다 깨는 마당에 이상은의 쉰 목소리가 들려오면 이제는 정신 차릴 시간이다. 하지만 현실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법. 그저 영원하지 못한 마법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두통은 여전한데도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싶어지면, 젠장, 중독된 것이다.

길게 자라나는 어어부 프로젝트

어어부의 첫 앨범은 ‘신기’였고, 두 번째 앨범은 ‘경이’었으나, 세 번째 앨범은 ‘숙취의 고통’이었다. 처음 어어부의 음악을 들었을 때, 나는 시적인 노랫말의 정말 멋진 팝이라고 생각했으나 사람들은 아방가르드라고 했다. 나는 동의하지 못하겠기에 공연을 보니, 늦게 도착한 비트닉 같은 남자가 토착화된 신스팝 사운드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데, 역시 가사는 랭보나 기형도와 동종으로,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잃어버린, 망실의 미덕을 갖춘 훌륭한 예술이었다.

 

어어부의 음악은, 뼈대와 살의 구분이 명확하고 뼈대가 언제나 소리의 가운데에서 척추로 명확하게 버티고 서는 모더니스트들의 사운드와 달리, 핵심이 되는 부분이 반복되어 전체로 자라는 다분히 유기체적인 데코룸decorum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각각의 데코룸을 지배하는 질서는 종종 상이하지만, 그 결합 방식은 결코 아방가르드한 것은 아니다. 그 직조 방식은 되려 듣기 편안한 1980년대의 영국 유행가 같은데(따라서 적잖이 멜랑콜리하다),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토착화되어 있고, 또 각 소리의 결마다 아주 재치 있게 버내큘러 요소가 삽입되어있어, 결과적으로 데코룸이 지어내 보이는 소리의 건축은 아주 가치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결과로 지어진 소리의 건축을 앞에 놓고 그 형태가 다소 아방가르드하다고 말한다면, 이의를 달 생각은 없다.

 

이러한 독특한 소리의 구축 방식이 역사적으로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지는 아직 단서가 부족해 잘 모르겠으나, 각 음악의 구조는 장영규와 마부(혹은 백현진)가 음악을 만드는 방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장영규는 소리의 한 조각을 만들면, 그것을 늘이고 잡아당겨서 한 곡을 만들어내곤 한다는데, 그게 여차하면 지루하므로, 소리조각을 마부에게 던진다고 한다. 그러면 마부가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놀다가 소리조각들과 시를 앞뒤위아래로 이어 붙여 자라나게 한다. 그 자라난 형태는 예상치 못한 것이지만, 기실 소리의 한 조각, 즉 하나의 데코룸에 본디 내재되어 있는 형태다. 준자율성semi-autonomy에 의해 자라나는 일종의 미적 프랙탈aesthetical fractal인 것이다. 그러면 장영규가 요사스런 말들과 함께 자라난 데코룸의 변형발전태變形發展態를 가지고 다시 작업하여 뱀처럼 긴 소리의 시간을 만들고, 다시 그 시간들과 겹치는 다른 보조적 소리의 건축을 쌓거나 혹은 깎아내 하나의 완성된 노래를 만든다. 즉 어어부 프로젝트의 그 누구도 한 작품의 구조를 전지적 시점에서 관리, 관할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에, 소리는 자유롭게 자라날 여지spielraum를 획득한다. 허나 소리의 데코룸이 제 마음대로 자라는 것은 아니다. 소리의 데코룸을 흘리는 사람과 데코룸을 입에 넣어 우물거리는 사람에겐 독특한 소리 유전자와 독특한 혀가 있어서 언제나 일관된 개성의 작품을 내어놓는다.

 

각각의 작품을 무대에서 공연할 때, 어어부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음악을 다시 추창조追創造하는 데에 집중할 뿐, 자신들이 스튜디오에서 만든 사운드를 모사, 혹은 재현하는 지루한 일에 힘을 쏟지 않는다. 아직 나는 그런 장면을 목격한 적이 없다. 마부는 노래를 부를 적에 자신의 시를 표현하는 데에 집중하기 때문에 박자를 아주 심하게 밀고 당기곤 하는데, 장영규는 그 변덕스런 노래를 판소리 마당의 북잽이가 추임새 넣어가며 발리듯이 잘도 받아넘긴다. 한국인 음악가들 가운데엔 박자 감각에 융통성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장영규는 분명 특출한 예외다. 공연에서 마부는 모든 것을 시화하는데, 그것은 거의 1910년대의 미래파 시인들에 버금가는 능력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이 1910년대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어어부의 음악은 시간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역사적 포토몽타주이기에, 내게 묘한 슬픔을 안겨준다. 나는 그것을 성찰성reflexivity의 멜랑콜리아melancholia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청중들 사이에 층위를 설정해내기도 한다. 사실 어어부의 음악에 들어있는 모든 요소는 늦게 도착한 여러 가지 근대/탈근대로서, 각기 상이한 시간대에서 떠난 온 것이다. 어떤 요소는 1980년대의 영국 유행가에서 온 것이고, 어떤 요소는 독일 표현주의에서 온 것이고, 어떤 요소는 한국전쟁 이후에 굳어진 가짜전통음악에서 온 것인가 하면, 또 어떤 요소는 비트닉스에게서, 또 다른 어떤 요소는 할렘 르네상스에서 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모든 요소에겐 제 스스로 새로울 바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을 새로운 것으로 둔갑시키려는 일체의 시도를 하지 않는 가운데, 어어부는 별로 야심차지 않게 새로운 소리의 건축을 지어나간다.

 

나는 서울에서 음악이 무한건축공간을 지어내 보이는 공연을 보고 듣기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안다. 단언컨대, 1세계 밖에서 나고 자란 이가 소실점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소리로써 무한건축공간을 구축해내는 경우를 아직 듣고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어어부의 소리에서 소실점을 마주하려는 시도 같은 것을 느껴본 적도 없다. 소실점을 마주할 때 형성되는 머리털 서는 긴장감은 오늘날엔 진은숙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다. 그러니 어어부에게 아방가르드 운운하는 것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이들은 아주 멋진 대중음악가다. 이들이 지어낸 소리의 건축은 소실점 없이, 하한선과 상한선을 설정하지 않은 채, 소리의 데코룸이 자라남에 따르며, 그 성장의 리듬에 맞추어 즐겁게 노니는 시적 영혼이 기생하는, 세미라티스 구조의 무한 공간을 지어낸다. 물론, 이러한 데코룸적 소리질서의 구현은 봉건/대량생산된 전통/서양전통음악/서양대중음악/가요의 위계와 합작을 깨는 일로서, 대단히 1990년대적인 돌출이며, 근대화 이후의 남한에서는 전례 없는 일이기에 대단히 소중한 성과다.

안은미-어어부 프로젝트

어어부의 음악이 독특한 구축리듬을 갖게 된 이유를 장영규에게 물었다. 그는 그 이유가 어쩌면 애초에 음악활동을 안은미와 시작한 데게 있지 않겠느냐고 자가 추정했다. 그는 1990년에 안은미의 공연음악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음악가로 데뷔한 셈인데, 그 이후로 무용음악을 수도 없이 맡았노라고 했다. 그가 이어 말하길, 무용음악이라는 것이 하나의 모티프를 발전시키거나 이러저러한 음악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몽타쥬 작업이어서 아예 그것이 몸에 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설명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자가 설명은 재미있는 점을 설명해주었다. 이 이야기는 어어부의 음악의 뿌리, 혹은 적어도 초기의 주요 마디 가운데 하나엔 안은미가 박혀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이번 공연에서 관객/청중은 일종의 미학적 뿌리의 재회 혹은 재결합을 기대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조각은 자라고 닳아 다시는 영영 맞지 않는 수도 있다.

 

무용 공연에서 대부분의 경우 녹음을 트는데, 따라서 음악과 무용가의 대화가 이루지지 못하기 마련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노래방 기계에 대고 노래하는 가수의 심정이랄까. 따라서 녹음에 맞추어 추는 무용에서 섬세한 감정의 선을 살려내거나 그루비groovy한 동작의 흐름을 잡아내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만큼은 그 모든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안은미가 어어부의 새로운 음악에 맞추어 어떤 몸말을 풀어낼지도 궁금하지만, 장영규와 마부의 연주가 안은미의 몸노래에 맞추어 새로운 세션을 이루어낼 지도 적잖이 궁금하다.

 

안은미는 새로운 음악에 맞추어 공연을 준비하는 경우, 비트beat만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놓고 연습을 한다. 무대에 올라가지 직전이 돼서야 완성된 음악으로 맞춰볼 기회가 오는데, 그러면 처음 듣는 음악에 맞춰 거의 완전히 새로 안무를 짜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사실 우리 일반 관객들이 바로 그 광경, 즉 안무가가 갓 탄생한 새로운 음악에 맞추어 작품을 변주, 창작해내는 순간을 지켜볼 수 없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진짜 예술은 바로 그 충돌의 순간에 있기 때문이다.

 

안은미와 절친한 건축가 조민석은 매번 그러한 충돌을 목격할 때마다 불안하고 초조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안은미는 본디 무용은 그러한 것이라고 태연하게 응수한다. 그러고 보면 직업적 차이는 참 흥미롭다. 건축은 기초가 분명해야 구축이 가능한, 명확하게 ‘정-반-합’적인, 해체건축이라고 해봐야 결국 중층변증법重層辨證法적인, 즉 대단히 논리적인 것인데 반해, 무용은 실오라기처럼 얇은 기둥에 시그램 빌딩 분량만큼의 논리와 매스를 세워버릴 수도 있는 기이한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어어부가 내놓은 소리의 뼈가 어떠한 조형으로 자랐을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무대에서 추창조될지, 안은미는 그 소리의 연희에 맞추어 자신의 몸말 – “Kill Me, Forgive Me, Don‘t Cry”를 어떻게 공간구성spatial composition해냈을지, 또 그것을 무대에서 어떻게 연기해낼지, 나는 정말 궁금하다.

 

나는 어어부와 안은미의 공연을 앞두고, 양자 모두의 작업을 골목길의 공간경험으로 기억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본다. 안은미와 어어부는 공히, 탈식민기를 살아가는 세계시민으로서 열린 태도를 지니고 있고, 위항인委巷人의 진경성眞景性 위에 꽃피었던 식민의 근대성을 이어받았으되, 이전 세대들이 지녔던 도저한 콤플렉스로부터는 자유로운, 지극히 1990년대적인 존재들이다. 물론 관객/청중 가운데 하나인 나도 그렇다. 나는 공통의 맥락이라는 길게 자라난 환영을 본 것인가? 하지만 교묘한 차이도 존재한다. 이니 언급했듯이, 안은미가 그려낸 골목이 종합적으로 보아 초현실적 구조를 가지는 데 비해, 어어부가 그려내는 골목 혹은 동굴은 세미라티스semilatice의 입체 구조를 가진다. 그 차이의 일부는 개개인의 역사적 차이에 기인하고, 나머지 일부는 장르적 차이에 기인하는 것일 테다.

 

그러고 보면 무대에서 박수 받는 예술가들이 제일 기이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몸 하나로 때우는 사람들이 제일 용하다. 그들은 연금술사이고, 복화술사이고, 환각술사들이다. 막이 오르면 관객/청중들의 뇌수는 그들의 것이니, 나는 마음을 놓고 내 몫을 내맡길 작심이나 해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