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 안은미가 시베리아 샤먼인 이유 몇 가지 – 김남수

안무가 안은미가 시베리아 샤먼인 이유 몇 가지

김남수(안무비평)

 

거대사 혹은 지구사 관점에서 볼 때, 발레는 서구 근대에 자율적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종족춤이다. 이런 논리를 개방하면, 현대 서구 컨템퍼러리 댄스 역시 삶과 정치의 결합을 블랙박스라는 액자에 집어넣은 종족춤이다. 안무는 조직된 움직임이며 재구성된 신체이지만, 그것이 보편적일 수는 없다. 최근까지 한국이나 일본처럼 주변부 입장은 탈식민주의의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서구 근대의 안무 문법을 거부하는 자태로 동시에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이중적인 것이었다. 그래서는 끝이 없다. 

 

안무가 안은미의 존재를 새롭게 조망할 필요는 이런 관점에서 싹튼다. 그의 행보는 현재 커뮤니티 댄스에 이르러 있다. 그것이 한국 사회에 큰 트렌드를 제공하여 각 아트센터마다, 각 지자체마다 다시 커뮤니티 댄스피버에 휘말려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그런 문화 현상을 떠나서 안무가 안은미의 계보학을 가동해봐야 하지 않을까. 거대사 혹은 지구사 관점을 채택하고자 한 것은 그 계보학이 어디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떤 문화복제자 밈(meme)의 연어여행인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동시에 밀란 쿤데라가 <불멸>에서 말한 “사람은 많되, 몸짓은 적다”는 금언이 얼마나 진리인가를 재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안무가 안은미가 시베리아 샤먼으로 재출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 일종의 격세유전(atavism) 현상이라고 생각되는데, 이것이 “태초와 현재의 비밀협약”(아감벤)이라는 예술사의 비밀이 다시 한번 통한 결과라고 해도 좋다. 시간이란 이처럼 현재에 구멍을 뚫어 가늠할 수 없는 시간대와 용접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안무는 그 시간의 교환 과정에 개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겉보기에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러한 제안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더 이상 안무가 안은미를 수식할 때, “빡빡머리 파격” “도망치는 미친년” 정도의 사회학적 차원에서 반복되는 언사들이 식상하기 때문이다. 지난 십년 동안 안무가 안은미에게 내포와 외연, 들숨과 날숨, 몸과 몸짓, 접힘과 펼쳐짐의 이중운동은 거의 대부분 인류학적 차원의 베이스, 그 통주저음을 거치지 않으면 이해하기 곤란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회학적 차원에서 인류학적 차원으로의 전회는 현재 이어지는 커뮤니티 댄스와도 직결된다. 그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자.

 

먼저 내가 안무가 안은미를 시베리아 샤먼의 재출현으로 보는 이유를 설명하기로 한다. 첫째 그의 댄스 스케이프에서 항상 트레이드 마크처럼 나타나는 기묘한 형광의 세계이다. 빛에 가까운 색채들의 지나친 난무는 그의 안무를 이야기할 때, 장점이자 단점으로 치부되었다. 말하자면, 셈셈이라는 것인데, 그런 식의 논법은 안무가 안은미가 홍대문화 전성기 시절 익힌 대중문화 체험이라든가 샤머니즘이나 대승불교의 색채감 선호 같은 데서 찾아온 것이 대부분이다. 마치 한국 무용계에서 ‘총천연색’을 독점하겠다는 듯이, 그래서 다른 안무가가 그런 색채 향연을 펼칠 때면 으레 “안은미적이다” “안은미스럽다” 라는 인상비평을 받았듯이 오인되어 왔는데, 사실 이러한 형광의 색채 세계는 시베리아 샤먼에겐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세계는 시베리아 샤먼이 굿(Gut, 퉁구스어로 ‘정신’이란 뜻)을 할 경우 복용하는 ‘광대버섯’ – 이름도 재미있다 – 의 환각적 세계이다. 종교학과 엘리아데는 <샤마니즘>에서 시베리아 샤먼은 항상 ‘광대버섯’의 탐닉가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광대버섯’은 어떻게 생겼는가. 일반적인 버섯의 외양에 빨간 바탕에 흰색 반점이 가득하다. 안무가 안은미의 무대에서 기본적인 색채감은 바로 레드톤 혹은 핑크톤에 소위 ‘하얀 땡땡이 무늬’이다. 언젠가 안은미씨와의 인터뷰에서 왜 그런 현란한 형광의 색채를 포기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것이 안은미의 세계입니다. 약 먹는 것보다 내 춤 보는 것이 훨씬 더 즐겁고 강렬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시베리아 샤먼의 환각을 전문술어로 “변성의식 상태 Altered State of Consciousness”라고 하는데, ‘광대버섯’ 속에 있는 “무스카리아 실로시빈”이라는 특유한 물질 때문이다. 이 물질의 가장 격조높고 정밀한 임상보고서는 올더스 헉슬리의 <모크샤>이다. 바로 변성의식 상태에서 산타클로스가 하늘을 날고, 루돌프 사슴코가 빨갛게 된다. 왜? 실제로 시베리아나 툰드라의 순록들은 눈 속을 헤치고 ‘광대버섯’을 즐겨 먹는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선물을 증여하는 신으로서 산타클로스 역시 하늘을 난다. 이는 시베리아 샤먼이 하늘을 난다는 이치와 동일하다. 그래서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에서는 헬기에 샤먼들을 가득 태우고 추락시켰다고 한다. “어디 한번 하늘을 날아보시지.”

 

안은미의 안무 작품 중 가령, <정원사>에서 하늘을 난다든가 <은하철도 000>에서 다른 은하로 날아가는 작품들은 대개 환각적이며 신이한 상상력의 구현이다. 이는 <삼국유사>에서 곰이 사람 될 때의 ‘득신 得身’ 이라든가 두 스님이 금빛 물로 목욕하고 미륵이 될 때의 ‘작신 作身’ 같은 “변성의식 상태”를 현현시키는 형광빛의 거울 세계로 보인다. 그런데 ‘광대버섯’과 비슷한 ‘아야우아스카’ 체험을 하는 남미의 샤먼들은 두 마리 우주뱀의 환각 세계를 누비는데, 이들은 그것을 가리켜 “숲 속의 텔레비전”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이 역시 안무가 안은미의 형광 세계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안무가 안은미가 추는 춤, 만드는 춤은 대개 “신코페이션(syncopation, 당김음)이 있는 홀수박자 율동”이 있다. 기획자 김성희에 따르면, “안은미의 춤은 특이해서 외국의 안무가들도 쓰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런데 안은미씨는 한국 전통무용의 이수자가 아니다. 그는 ‘그냥’ 춘다. 진부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내부의 어떤 즉흥적 열기나 신명이 표출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표출 형태는 항상 ‘엇박’과 ‘허튼가락’이 예측불허로서, 일회성의 몸짓으로서 선율화한다. 안은미의 리듬적 신체가 그 돌연히 공간을 찢는 동시에 공간을 선율적 풍경으로 재편하는 광경은 뭐라고 형언하기가 참 힘들다. 몸짓의 악보라든가 무보라든가 하는 기록이 거의 불가능하다. 

 

안무로서는 <바리: 저승편> <바리: 이승편>을 비롯한 비교적 최근 작품들이 아예 소리꾼들의 ‘엇박’과 허튼가락’을 춤으로 전이시키는 급진적인 작업을 해온 바 있다. 이는 당김음이 있는 리듬의 사운드를 새나 뱀이 몸을 뒤채는 듯한 리듬의 율동으로 모방적 감염을 진행하는 흥미로운 형태였다. 아직까지는 그 접합의 결과가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실험적 하이브리드의 시도는 놀라울 정도의 근거가 있다. 

 

약간 과장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춤이 한국과 만주, 몽골, 시베리아를 거쳐서 중앙아시아까지 이어지는 리듬의 벨트에서는 문화복제자 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처음 이러한 이야기를 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었다. 그는 “신코페이티드된 3박자의 율동”이 카자흐스탄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갈파했고, 자신의 비디오아트 속에 가득한 춤과 음악들이 대개 트랜스유라시아 타입임을 밝혔다. 중국이 2박자 중심, 일본이 4박자 중심인 것과 비교하면 이 홀수박자는 놀라울 정도로 문화적 특이성이 있다는 것이다. 백남준은 이것이 가까운 미래에 한국의 문화적 자산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 바도 있다. 또한 음악인류학자 후지이 도모아끼의 <아시아 민족음악 순례>에 보면, 일본과 중국을 제외하고 한국부터 중앙아시아, 터키까지 3박자의 율동이 “솟구치는 형태”로 출현하고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 지역은 근대 시기에 서구의 식민지가 된 경험이 없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춤과 음악의 연구가 더딘 곳이다. 그러므로 잠재적인 형태로만 암묵지 상태를 면치 못했는데, 어떻게 안무가 안은미를 통해서 그처럼 인류학적 무의식이 분출하고 있는지 놀랍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도 흥미로운 것은 “허튼 가락”(채희완)이라든가 “어깨춤” “즉흥춤”(백대웅)이라든가 하는 남한 내부의 지적과 “뛰고 날아오르는 형태”(후지이 도모아끼)라든가 “격렬한 동태”(미야오 지료) 같은 아시아 춤의 인류학계의 지적이 묘하게 맞닿는가 하는 점이다. 

 

안무가 안은미는 진작부터 샤머니즘의 영향권에 있음을 이야기해왔지만, 그것이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문화복제자 밈의 새로운 격류로서 출현하고 있다는 평가는 없었다. 사실 한국의 많은 전통무용가들은 대체로 내림굿의 관습이라든가 작두타기, 용왕 친견 같은 코드들을 사용해왔지만, 그것은 코드 그 자체의 반복사용이라 안무라고 할 것이 없었다. 학습된 신코페이션은 마치 외워서 하는 시나위 가락처럼 ‘죽은 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안무가 안은미는 ‘산 형태’의 홀수박자 리듬을 한국 안무계에 퍼뜨려 왔고, 지금도 퍼뜨리고 있다. 

 

셋째, 안무가 안은미는 신체를 ‘몸주대감’ ‘직성대감’ 타입으로 사용하는데, 그것은 결국 시베리아 샤먼의 트랜스와 맞닿아 있다. 안은미 컴퍼니의 무용수들은 대체로 신체를 혹사한다. 연습 과정이 극한을 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그 극한과 그 바깥의 무한을 탐문한다. 언젠가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극장에서 <Louder? Can You Hear Me?>라는 안은미의 안무작품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캔버스를 찢듯이 벽을 뚫고나온 무용수의 신체들이 하나같이 무릎 관절을 하늘 높이 점프하여 바닥에 찧곤 하였다. 그 도저한 매저키즘의 세계에 경악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북방아시아의 굿에서 입무자들이 상징적으로 팔다리를 잘라서 굿판의 사람들에게 선물로 나눠주는 관습의 시연처럼 보이기도 했다. 특히 머리를 잘라서는 높은 나뭇가지에 걸어두는데 – 소머리나 말머리로 대신하기도 –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샤먼에게 천리안이 열린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신체의 극한, 그리고 파열은 남한의 대감굿에서는 보다 부드럽게 처리된다고 본다. 바로 몸 전체의 주권을 바깥의 그 무엇에게 내어주는 ‘몸주대감’이다. 즉 몸의 주인이 되는 대감신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부토가 낯선 존재에게 몸의 주인을 허락하는 것이나 황석영의 <손님>에서 느끼는 현현 현상과도 일맥상통할 텐데, 그런 신체의 탈혼과 빙의가 ‘몸주대감’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몸주대감’의 원형이 안은미에게는 <Let’s Go>에서 시작된 것으로 인지했다. 이 작품에서 나는 “통나무와 같은 신체의 원형”이라고, 본래 기관화되기 이전의 잠재적인 신체로 역행하는 작업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Let me change your name>이라든가 <Let me tell you something>에서 그 신체들은 ‘통나무’를 넘어서서 어떤 기계적 강박이 끈질기게 벌이는 향락적인 경지라든가 다시 한국의 저 아래의 몰락하는 정신 속으로 되먹임되는 팝아트적 지평이라든가 하는 현상으로 표출되었다. 그것은 ‘통나무’가 쪼개진 것이 아니라 이미 비어버린 신체 속으로 무엇인가가 들어온 것이다. 즉 ‘몸주대감’이라고 보여졌다.

 

그럼 ‘직성대감’은 무엇인가. “너, 웬만해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지?” 라고 반문할 때의 그 직성이다. 즉 직성이 풀리지 않는 대감이다. 안무가 안은미의 안무는 어느 인터뷰에서 스스로 말하듯이 “속도를 스트레이트로 극한까지 올려서 마지막에 잡아돌리는 형태”를 추구할 때 바로 이 ‘직성대감’이 나타난다. 무용수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이 ‘직성대감’이 씐 자들만이 무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팔이 떨어져 나가는지,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지 모르고 춤의 신명이 지펴서 절대적인 속도 – 마치 ‘등자’ 하나로 합체된 말-인간이 신체가 맛보는 최고의 밀착감과 속도감 – 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 ‘몸주대감’과 ‘직성대감’을 통해서 우리는 술타령도 하고 돈타령도 하는 셈이다. “엄청난 물량을 때려부어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망가뜨리겠다”는 안은미씨의 발언은 ‘앞다리 선각 뒷다리 후각 양짓머리 걸안주’를 실제로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무화시키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증여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기금보다 더한 화폐를 들여 자기 작품을 만든다는 증여의 논리가 성립한다. 그런데 욕심많고 탐심많은 지역의 대감이 몽골, 시베리아로 가면 텡그리라는 하늘신이 된다. 우리는 태양숭배가 아니라 하늘숭배였고, 그 영향이 가없는 하늘이 지역에 눌러붙은 터줏대감으로 간신히 고여있다. 그러나 하늘신을 대감으로 모셨을 때, 우리 샤먼들은 안무가 안은미처럼 무한방출하는 선물의 세계에서 거닐었을 것이다. 

 

이처럼 문화복제자 밈의 검토 없이 안무가 안은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프로시니엄 무대라는 액자 속에 블랙박스의 협애한 미학을 강요하는 것에 그치는 듯하여 불편했다. 지금은 파리 께 브랑리 인류학박물관이나 브뤼노 라투르 혹은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이나 뉴미디어와 인류학의 접합지점을 찾는 독일 칼스루에의 ZKM이나 모두가 예술이 비예술의 저 잠재적인 세계, 특히 인류학적 재전유가 필요하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시대이다. 그렇게 동시대 감각이 변하고 있다며, 이에는 못 이기는 척 따라주는 센스도 필요할 것이다. 참으로 사람은 많되, 몸짓은 적은 이유가 바로 이러한 감각의 동향과 흐름에 둔감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저 한국전쟁 이후 60여년 동안 고립된 채 갈라파고스 현상과 우물 안 개구리 현상에 만족해온 것을 이제는 깨야 할 때가 아닐까.

 

물론 안무가 안은미는 시베리아 샤먼이 아니다. 위에서 말한 문화복제자 밈의 대리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하고 독특한 길을 처음으로 가면서, 뒷사람들에게 그 길을 밟고 오라는 목소리를 내는 안무가이다. 그러나 정말 뛰어난 예술은 모든 예술론을 물리치는 법이다. <햄릿>에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명대사 “Time is out of joint.”에 들뢰즈고 데리다고 바디우 등등이 놀아났지, 예술가가 철학자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춤은 어떤 철학자도 제대로 칼을 꽂지 못한 완벽히 살아있는 영역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나는 우회적인 타입의 관점이동을 한 것이다. 조금 더 한다면, 이런 것이다.

 

현재 안무가 안은미가 하고 있는 커뮤니티 댄스, 즉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시발로 하여 <땐싱마마 프로젝트> <사심없는 땐스> 등등은 ‘무감서기’의 퍼포먼스이다. ‘무감서기’란 굿판에서 샤먼이 아님에도 “그분이 오시는 듯한 느낌” – 실제로 오는 것은 아니고^^ – 에 ‘몸주대감’의 트랜스 상태 혹은 “변성의식 상태”가 되어 스스로 춤추고 노래하고 사설을 읊고 땡깡을 피우는 공연 타임이다. 이는 자아의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짐을 벗고 스스로 새나 뱀의 권능으로 날아오르고 꿈틀거리는 것이다. 

 

이것이 몽골과 시베리아를 거치면 항상 ‘동기감응’ 즉 “같은 기운을 감응한다”는 차원에서 일어난다. 양을 잡는 초원의 벌판에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모두 길게 길게 장가를 뽑는 것이다. 초원 저편까지 울려퍼지는 공명을 가득 생산하면서. 해방 공간의 서울 아침마다 동산에는 노인네들이 올라가 장가를 뽑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유구한 전통이었다. 그러한 소리의 공명, 율동의 공명이 바로 ‘동기감응’이 되고, ‘의기투합’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회학에서는 이념의 공동체로서 ‘공중 public’을 이야기해왔는데, 실제로는 공명의 공동체로서 ‘공중’을 이야기해온 것이 북방아시아의 사회적 감각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공중’이야말로 진짜 커뮤니티이며, 최근 다시 관심을 받고 있는 가브리엘 타르드의 사회학의 핵심이다. 이런 식으로 의기투합된, 함께 땅을 밟고 함께 손발을 놀리는[踏地低昻 手足相應] 커뮤니티가 다시 출현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