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Nam Su

2020-08-12

구름의 용과 물의 용 사이에서 혹은 서로 갈마들며 춤추다

김남수(안무비평)

 

 

#1. “우리가 용에게 두려움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칼 세이건, <에덴의 용> 중에서)

#2. “거기가 지식의 원천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불을 뿜는 수룡[水龍]처럼 물 속에 살면서 포톤[photon, 光子]을 방출하는 DNA.” (인류학자 제레미 나비, <우주뱀=DNA>중에서)

 

 

저 하늘에 두 개의 메가번개가 교차

우주정거장에서 저 아득한 우주 공간이 아니라 지구를 향해 망원경을 돌린다면 어떻게 될까. 즉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푸른 행성의 내부로 시선을 돌리는 앵글 조율을 하면? 그때는 지구의 대기층에서 매분 엄청난 규모의 번개 섬광이 들이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번개들이 다름아닌 용[龍, Dragon]의 원류라면 어찌할 것인가. 용으로서의 번개라는 현상은 이제 저 두껍고 높은 구름 저 위쪽의 대기권에서 일어난다면? 이런 주장이 문화인류학과 뇌과학을 묶어서 펼쳐진 것은 초유의 일이 아니며, 놀랍게도 흥미로운 선구자들이 있었다. 아시아 북방의 용과 아시아 남방의 용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이 번개로서의 용 이야기를 깔아보고자 한다.

 

우선 우리가 현재 볼 수 없는, 그러니까 우주정거장에서는 내려다 볼 수 있는 천문 현상이자 기상 현상으로서 메가번개[Mega Lightning]가 있다는 것을 상상해보자. 쉽지는 않겠지만, 이런 비유를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장마 때 “비가 양동이째 들이퍼붓는다” 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차용하여 “번개가 양동이째 들이퍼붓는다” 라고 해야 비로소 상상의 문을 열기 시작하는 셈이다. 현재 산악 지형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삼천미터 이하의 구릉지대(?)로 이어지는 한반도에서는 화북 이북의 대평원이라든가 아메리카 대륙의 대평원처럼 완전하게 펼쳐지는 오픈 스페이스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겪기 힘들다. 

 

모든 것으로부터 시각적 장애물이 치워진 영역은 대평원뿐만 아니라 대양이라는 공간도 있다. 그것은 아시아 남방의 몫이자 서태평양까지 열려지는 지역의 몫이기도 하다. 좌우간 여기서는 메가번개의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보고자 하는데, 하나는 ‘레드 스프라이트 Red Sprite’ 라는 현상으로서 일반적인 적란운 구름에서 번개가 칠 때 전이된 상층부에서 이차적으로 증폭되는 초거대 번개이다. 이것이 “번개가 양동이째 들이퍼붓는다”라는 현상이자, 소위 말하는 “하늘에 인드라라는 진주그물이 쳐져있다” 라는 인도의 베다 신화가 <금강경>까지 이어달리기 하는 설화의 정체이다. 그 진주그물은 번개가 치는 것으로써 순간적인 교직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블루 제트 Blue Jet’라는 현상으로서 수직적인 구름의 상층부로부터 전리권 고도 40-50km까지 위쪽으로 치는 거대 규모의 번개이다. 이는 우주에서 관찰되는 태양의 홍염 만큼이나 스펙터클한 지구의 신호인 셈이다. 아마도 영문모르고 지나가가는 외계인이 본다면, 인류의 골든디스크보다 이쪽을 “저기 생명이 있을 가능성이 있고, 아마도 그 생명체가 보내는 신호일지 모른다” 라고 생각하기 쉬운 타입이다. 

‘레드 스프라이트’와 ‘블루 제트’ 즉 하나는 땅을 향해서 내리치는 번개지만, 또 하나는 하늘에서 더 높은 하늘로 들이치는 번개이다. 아래로 향하는 번개와 위로 향하는 번개, 이 두 개의 번개는 저 하늘이자 하늘의 지평선 – 천평선[天平線]이라고 한다 – 에서 서로 교차한다. 이를 본 고대인들에게 어떻게 감흥을 촉발했을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투명한 태초의 대기 상태에서 이 교차 현상은 특별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것이 아프리카가 됐건 유럽이 됐건 그리고 중앙유라시아 또는 동아시아가 됐건 각 문화권별로 기술하는 용어는 달라도 비슷한 요소들이 있었을 것이다.

 

 

황룡과 청룡으로부터 벗어나기

중국 저 너머 북쪽의 어느 지역에서 이 천문 현상이자 기상 현상은 황룡[黃龍]과 청룡[靑龍]으로 상상되었다고 판단된다. 결국 이 두 마리 용들의 용틀임하는 짝짓기이자 관능적인 우주쇼는 중국의 구심력 있는 문화로 흘러들어서 저기 저 동대문의 문루 천정에 새겨진 것처럼 특정한 형상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우리에게 그러한 문화적 상징들은 본래의 그 에너지파가 갖는 무명의 이미지 혹은 기호로부터 아스라히 멀어져 있다. 아무리 해도 그 황룡과 청룡은 중국적인 클리쉐로만 자꾸 연상되기만 하는 것이다. 사실 아시아 북방의 용과 남방의 용들이 새롭게 신선한 결합을 하기 위해서는 이 황룡과 청룡이 갖는 문화적 특정성을 깨고 그 색채 감각이자 스케일을 그대로 유지할 때 가능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아무런 국경선이나 종족의 활동범위권이 그어져 있지 않은 우주로 나아가 번개로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 이 글의 초입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접근은 아직까지 완전히 사멸하지 않고 여기저기 다소 남아있다. 그것은 북방보다는 남방 쪽이 더 그러하다. 가령, 종종 고대의 유목과학은 그 터무늬의 근거가 발견되지 않은 채로 고도의 과학적 수준을 유지하곤 하는데, 이 번개의 과학 역시 아시아 남방에서 용의 신화적 상상력을 우주적으로 펼쳐 보여준다. 가령, 태양계의 다른 행성에서 일어나는 천문 현상, 즉 목성의 커다란 붉은 반점[大赤點, Great Red Spot]이라든가 해왕성의 푸르게 보이는 색채감이라든가 하는 것이 망원경 뷰파인더에 눈길을 드리울 때 발견되는 것과 거의 동일하게 지구의 대기 역시 보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연으로부터 열대적 상상을 빌어서 표현되는 총천연색의 바틱 무늬는 소용돌이치고 있다. 대적점이나 토성 고리처럼. 소용돌이는 용의 특권이자 용의 기원이다. 소용돌이는 인간 내부의 감각과 저 자연의 감각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증할 뿐만 아니라 두 감각들을 매개하는 작용을 한다. 바틱 무늬는 인도네시아에서 직물 이미지로 보여주는 빛과 색의 교직 작업이지만, 그 교직은 이미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 교직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저 하늘의 번개들이 질서 – 혼돈의 질서 — 로 자리잡는 과정을 은유하고 있으며, 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번개 소용돌이와 저 위에서 내려치는 번개 소용돌이가 서로 어울리는 광경의 알레고리 – 이 알레고리의 실증적인 근거는 한자로 신[神]의 고대형은 ‘펼 신[申]’이었고, 이것의 갑골문이 두 개의 번개 소용돌이가 서로 만나는 그림으로 되어 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번개 두개의 새끼꼬기는 곧 신[神, God]이다.” 라는 것 — 이기도 하다. 

 

지구의 역사에서 초기인류는 번개 두 가지로부터 신을 성립시켰고, 그때 “신은 바로 번개였다(빅 히스토리언 신시아 브라운).” 번개는 하늘과 우주가 하나로 통합된 세계 전체를 내리치는 신의 무기였고, 농업경제과 유목경제가 서로 전쟁을 하면서 수많은 종족신들 가령, 제우스, 인드라, 미트라, 오딘, 치우천왕, 스사노오노미코토 등등이 신봉되었을 때 그 신격은 번개를 움켜쥐고 있었다. 소위 번개신의 시대는 용들이 수직적 숭고함을 탐하는 기둥축[axe]을 세우는 시간이었고, 그것은 자본주의의 끝을 치닿는 현재에도 거의 변함없는 현상이기도 하다. 즉 지난 수만년 동안 황룡의 시대라고 할까. 그에 대해서 청룡은 왕[王]의 권력이 돌도끼에 응축되어 있어 내리치는 서슬에 생긴 돌의 스파크에 의해 땅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블루 제트’를 상징한다고 할까. 하늘번개에 대응하여 땅번개의 하극상이라고 할까. 

 

 

구름의 운신과 그 운신폭에서 나타난 이미지 그리고 용

왜 우리는 용을 생각하면, 종종 두려움을 느낄까.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에덴의 용>에서 뇌과학의 성과를 검토하면서 용[龍]이라는 인지 현상을 생각했다. 그가 본 용은 과거 중생대의 거대한 생명체로서 2억6천5백만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 지구를 망가뜨리지 않고 평화롭게 다스렸던 황금시대의 주인공, 즉 다이너소어[Dinosaur, 恐龍]인데, 그 공룡에 대한 포유류의 두려움, 공포 그리고 트라우마가 현재의 인간 종족에까지 어떻게 어떻게 전해진 것이 아닌가 라는 식으로 흘러버린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실증할 수 없는 이러한 추론에서 느껴지는 것은 어쨌든 우리 내부에 용의 두려움을 느낄 만한 수용기[受容器, receiver]가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실상은 어떠한가. 이 용의 기원을 찾으려면, 저 우주공간에서 펼쳐지는 지구 대기의 메가번개를 인간의 인지 능력과 상상력이 어떠한 수용기로서 받아들여 종합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것은 ‘구름의 철학자’ 니체라고 생각된다. 그는 일단 번개를 잠재화하고 있는 구름에 주목했다. 즉 니체는 구름이 번개를 품고 있는 것을 꿀을 많이 가진 꿀벌과 같은 신세로 생각했다. 그때의 번개는 인간을 징벌하는 신의 무기가 아니라 문명의 발달을 따라서 새롭게 전환된 그 무엇이다. 즉 여기서는 인간의 두뇌 속에서 전구가 반짝 켜지는 굿아이디어의 발현 – 내부섬광[phosphine] — 을 의미했다. 저 하늘의 메가 규모로 들이치는 번개 다발의 천문 현상이 인간의 두뇌 속으로 슬슬 기어들어간 것은 신석기 혁명의 한 중요한 포인트였다는 것이 최근 인지고고학의 성과 중에 하나이다. 

 

이때의 구름은 인간두뇌의 가장 우주에서 진화의 최신식으로 평가받는 소위 신피질[neocortex]에 해당한다. 다만 우주에서 보이는 지구를 휘감은 번개용들이 보여주는 초고전압 초고전류가 인간두뇌 속에서는 지극히 섬세하고 지극히 복잡한 초미전압 초미전류로 전환된 것이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초고밀도 집적회로의 기판 위에 새롭게 변주되고 재설정된 회로를 무한히 열어가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용들은 인간두뇌 속으로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추정이 아니라 현재 거의 정설화된 팩트로 밝혀지고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역사학자 이태진은 <신한국사>에서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레드 스프라이트’나 ‘블루 제트’가 초기인류의 눈에 잘 띄었고, 그 엄청난 정신적 트라우마가 암각화 – 가령 천전리 암각화 – 같은 고대의 예술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 암각화의 수많은 기하학적 문양들은 저 태초의 하늘부터 현재의 대기권 상층부까지 들이치고 있는 번개용들인 동시에 현재 인류의 두뇌 속에서 반짝 하는 미세한 불켜짐 현상으로 나타나는 우주뱀[cosmic serpents]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신경세포 안에 그리고 DNA 속에 살고 있는 내부섬광이자 그 섬광 이미지로부터 탄생한 용들이란 것(제레미 나비, 에드워드 윌슨). 지대무외 지소무내[至大無外 至小無內].

그러니까 암각화 속에 들어찬 그 현란한 상상적 이미지(들)은 대개 소용돌이 무늬거나 세개의 동심원 무늬거나 폭발하는 섬광 무늬 등등 현재 15가지의 기하학적 문양 — 17세기 동유럽의 위대한 생리학자 푸르킨예가 발견하고 뇌의 신경세포를 그러한 문양의 ‘수용기’로서 정립 – 으로서 저 바깥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현재 두뇌 속에서도 똑같은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발견된 상태이다(미하일 돌마토프, 나카자와 신이치,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 즉 번개신의 무기로서 천지 사이를 가르고, 저 우주로 지구의 존재 신호를 보내는 푸른 섬광이 우리 두뇌 속에 똑같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저 하늘에는 별들이, 내 마음에는 도덕이라는 별이..” 라고 말한 어느 철학자의 주장은 은유적인 표현이지만, 사실인 셈이다.

다만 구름 속에서 용의 조형술은 1) 15가지의 기하학적 섬광 무늬 2) 무늬과 무늬들의 겹침과 결합 3) 소용돌이 메커니즘 4) 용이라는 구체적인 상상동물 등의 4가지 단계(미하일 돌마토프)를 거친다는 것이다. 즉 이 환상의 동물은 단박에 꿈 속이나 환각적 상태 속에서 출현하는 것 같지만, 몇 개의 정교한 기술적 단계를 거치고 나타나는 정확한 상상동물인 셈이다. 우리는 현재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권에 속해 있어서 중국의 용 조형술에 지극히 익숙해 있다. 고로 닭의 벼슬, 물고기의 비늘, 사슴의 뿔 등등 9가지 동물들의 부분들로 구성된 용이 얼마나 특정한 문화적 형태인가를 각성하기 힘든 상태이다. 사실 아시아 남방과 북방의 용들의 질서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중국의 용을 버려야만 시작될 수 있다. 위와 같은 장황한 내력을 펼쳐온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이다.

 

 

아시아 남방의 용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의 아시아 남방 지역에도 용[龍, dragon]의 문화가 풍부하다. 물론 그 용은 불교와 힌두교를 비롯한 인도문화 영향을 많이 받고 있지만, 그 지역의 문화적 저변 그 자체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인류의 두뇌 속에 숨어든 번개다발의 발현이 보편적인 것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아시아 남방, 특히 베트남의 문화를 볼 때, 용은 아시아 북방이 표방하는 전형적인 번개신의 신격과는 다소 다른 위상을 갖는다. 용은 번개신[雷神]이라기보다 수신[水神]에 가깝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물 속에 잠긴 용, 즉 수룡이라는 시적인 표현은 인류학자 제레미 나비가 쓴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의미는 대강 이러하다. 섬광의 기하학적 무늬가 물이라는 매질[媒質, medium quality]을 통과할 때, 화생[化生]하고 변신하는 상상력이 훨씬 더 풍부하다는 것이다. 물과 달[月, Moon] 그리고 여성적 무의식이 하나로 꿰어져 있는 이 화생적 생성의 신화를 나비는 “빛알갱이를 내뿜는 DNA” – 실재적이든 상징적이든 – 라는 지점에서 찾고 있다. 게다가 DNA는 두 개의 게놈 계열이 황룡과 청룡처럼 서로 새끼를 꼬듯 사슬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야말로 샤머니즘에서 우물 속의 용 두마리가 마중물 노릇하는 무당의 작두쇼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 다름아닌 DNA의 퍼포먼스라는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이를 우리 두뇌 속의 구름에 비춰보면, 그 구름은 번개를 낳기도 하지만 비를 뿌려서 저 아래 땅의 저변에 물을 드리워 바다가 되게 하기도 한다. 번개 vs 물.. 이라는 이 대극 구도는 아시아 남방의 용이 번개로써 저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치는 신의 무기인가 질문하면, 그런 게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이미 비라는 부드러운 물질로 지상에 당도하여 저 거대한 대양의 물을 구성하고 그 물 속에서 2차적인 방식으로 인류와 상호교류하는 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2차적인 용, 즉 수룡이 1차적인 용, 즉 번개용보다 더 진전된 것일지도 모른다. 늘 번개는 스펙터클하게 들이치면서 위용을 과시하고 있지만, 물이란 그 비밀스런 내막을 안으로 여민 채 가만히 짐묵하고 비가시적으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하기 힘든 처세이자 신세가 아닌가.

 

우리 두뇌 속의 구름, 즉 신피질은 6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매우 축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즉 용들은 물 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그 용들을 일깨우는 것은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번개용의 방전 현상이다. 즉 우리 두뇌 속의 초미전압 초미전류의 번개방전이 물이라는 전해질을 감전시킨다. 실제로 우리 뇌의 신경세포는 한번은 전자기적으로 작동하고 또 한번은 화학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태국의 석학 쑤멧 춤싸이는 자신의 저작 <물의 신 나가>에서 이렇게 작동하는 용들의 질서를 태국뿐만 아니라 서태평양까지 넓혀서 논하고 있다. 저 자연과 우주의 외부적인 현상을 다시 우리 신체 내부의 정신적이면서 물질적인 현상으로 등치시키는 것은 어딘가 알싸한 데가 있으면서 용이라는 상상동물이 이미 우리 내부에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실감을 재촉하기 시작한다.

 

 

구름의 용과 물의 용 사이에서

아시아 북방의 용을 구름의 용[雲龍, Cloud Dragon]이라고 한다면, 아시아 남방의 용은 물의 용[水龍, Water Drag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별은 무엇을 말하는가. 구름의 용은 저 아득한 대기권 바깥에서 관찰되는 거대한 천문 현상이자 인간사회에 투영되었을 때 ‘신적인 권력’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 하이어라키를 상징한다. 신이 탄생한 번개다발의 현상은 그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지만, 문명사회의 발달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족이 지상의 종족들을 다스린다는 신분질서의 관념을 강하게 내포하는 번개신의 신화를 이데올로기화한다. 자본주의가 가속화하면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계급갈등으로 번안되지만, 초고도화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로 세습적 신분질서로 퇴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단군신화 및 해모수신화는 이러한 수직적 하이어라키를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는 번개신의 신화이다. 치우천왕까지 합세한 동이족의 신화 체계는 하늘과 땅을 연결짓는 숭고한 신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이는 하늘-땅의 수직성이 곧 번개로 대표되는 무기도 무지지만, 그 수직성 자체가 거역할 수 없는 신분제 사회처럼 엄존할 수 있다. 가령, 인도의 카스트 제도 역시 처음에는 그저 인종주의적 신분질서의 강압적 시스템에 지나지 않았지만, 신화적 고착화와 더불어 점차 수직적 하이어라키의 움직일 수 없는 도그마로 변해갔다. 저 남방의 하이누웰레 신화에서 보여주는 수평적이고 동등한 생명 가치의 모험이 이 도그마틱한 세계에서는 찾기가 힘들다.

 

인류학자 옌젠과 그 일파는 인도네시아 세람 섬에서 “썩은 야자나무 가지”라는 뜻의 ‘하이누웰레’ 신화를 발견하게 된다. 이 신화는 곡물 변신, 혹은 사체화생의 의미를 담은 새로운 신화로서 세계신화의 구도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죽음 이후의 드라마가 핵심으로서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혹은 죽음을 초월한 일상이 펼쳐지는 신화였기 때문이다. 즉 이 신화는 한 여자아이가 죽으면서 시작된다. 겨드랑이에서 과일이 쏟아지고 사타구니에서 곡식이 나오며 침과 배설물에서 향기 넘치는 음료가 등장하는 이 여자아이가 아마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쯤으로 여긴 마을공동체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러나 출타중이었다가 돌아온 부모는 그 내막을 알고 여자아이를 장례 치르지만, 희한하게도 복수라는 관념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여자아이를 다섯 토막의 부분신체로 전달한 후에 숲의 여기저기에 묻어두는데, 그 묻은 자리마다 전혀 다른 나무숲이 만들어져 새로운 생명의 군락을 이룬다는 것이다.

 

아시아 남방의 이 ‘하이누웰레’ 신화와 물의 용[水龍] 사이는 아주 밀접하며, 마치 물의 용이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번성하게 하고 베푸는 캐릭터처럼 작동한다. 북방의 신화가 다섯마리 용이 끄는 마차를 타고 – 즉 총 여섯 마리의 용(들) 중에서 나머지 한 마리의 용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 – 내려오는 해모수라는 천신족의 이야기와는 완전히 유다른 서사이다. 우리 내부에 도사린 바리데기 설화가 그에 근사하며, 인도양의 관음보살 설화 그리고 황해의 선묘 낭자 설화 등이 또한 그에 가깝다. 무엇인가를 아낌없이 베푸는 자연의 증여 권능을 인간의 신화적 체계 속에 담지한 이 이야기는 북방의 번개구름의 용과는 그 위상학이 매우 다르다.

 

용[龍] 신화의 대극 구도

아시아 북방 – 구름[雲] – 번개신 – 천손강림 – 수직적 하이어라키 – 수레 – 유목문화 – 활쏘기

아시아 남방 – 물[水] – 물신 or 달신 – 사체화생 – 수평적 헤테라키 – 배 – 어로문화 – 변신

아시아 북방의 용이 저 아득한 우주에서도 보이는 ‘레드 스프라이트’와 ‘블루 제트’의 용틀임하는 번개다발의 위용을 뽐내는 신격으로서 이 땅에 강림한 것이라면, 아시아 북방의 용은 그러한 번개신의 권능이 함축된 구름의 단계를 모르지 않아도 그에 집착하지 않고 저 깊은 물 속에서 생명의 유전적 성격들을 삶과 죽음이 무화된 영역에서 새롭게 화생시키는 것에 가깝다. 이 두 가지 용의 유형학이 툰드라,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 오키나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등으로 이어지는 자오선의 궤적을 따라서 출현하고, 동시에 그 유형들이 서로 다른 배합으로 교차하거나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일이다. 즉 번개신의 권능과 물신 or 달신의 권능이 어느 한 가지가 양자택일되어 있지 않고, 적절하게 섞여서 묘용을 찾고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의미에서 번개신과 물신 사이에서 혹은 그 둘의 묘한 어울림으로부터 우리는 용의 상상력을 새로운 단계에서 접근할 수 있고, 또한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우주적이면서 동시에 내면적인 통찰을 기하는 사유의 한 방식이며, 지금처럼 코로나19 같이 재앙의 전면적인 습격을 따라서 지난 25세기 동안 유지되어온 문명의 축[軸, axe]이 부러져버린 형국일 때 새로운 생명적 문명의 판을 짜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수직적인 위계와 수평적인 연결이라는 두 가지 벡터 중에서 아무래도 민주주의는 수평적인 좌표계의 움직임에서 더 참조할 점이 많다. 그렇다고 해도 수직적인 좌표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우주적인 권능의 파워를 여전히 담지한 원천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 묘합의 운용을 찾아가는 것이 아시아의 용(들)을 상상하고 작금의 재앙적인 위기 상황이라는 조건에서 새로운 춤들의 문화를 설계하고 향유해가는 첩경일 것이다. 그러자면, 우선 ‘용의 체험’이 필요하다. 

 

용을 만나야 한다. 이견[利見]해야 한다. 이견한다는 것은 용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아차리고, 그 건재함을 실감한다는 것이다. 용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지금의 사회적 대타자로 상징화된 형태로는 용을 친견할 수 없다. 용은 지금에 와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용은 그 옛날 무엇이든지 가변하고 변통하며 생산하는 곳에는 이미 개입해 있었으며, 다름아닌 그 가변과 변통 그리고 생산 그 자체이기도 했다. 가령, <삼국사기>라는 정사에서나 <삼국유사>라는 야사에서나 동등하게 용은 그 시대의 리얼리티였고,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주요 변수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신념체계가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자, 어찌할 것인가.

 

여기에 아시아 북방의 용과 남방의 용이 도킹하는 무대의 춤들, 춤들이 어울렁더울렁하면서 서로 이해하고 그 에너지의 곡선적인 흐름들이 엉키고 새롭게 증폭되는 가운데 탄생하는 새로운 춤들 속에 용은 나타날 것이다. 미래형으로, 그리고 우주적이면서 동시에 내면적으로. 눈을 감고 깊은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DNA의 빛알갱이가 용으로 화하듯이. 그리고 황해도굿에서 우물 위 작두를 타는 마중물격의 무당의 퍼포먼스로부터. 또한 저 베트남 고래섬 앞바다에 나타난 고래라는 이름의 용과 만나면서. 인도로부터 흘러들어와 태평양까지 휘어잡은 용왕신 나가와 그가 받쳐든 향기로운 향로 연기로부터. 문화의 저변에서 아직까지 해석되지 않은 에너지의 순수한 단초로부터 용은 암시되고 새롭게 발현될 것이다.

 

활쏘는 사람의 눈빛은 말을 타면서 “바람보다는 한 길 빠르고, 생각보다는 반 길 빠른” 놀라운 속도 위에서 이미 화살을 명중시킨다. 눈빛은 이미 마음이고, 시각 너머의 미래이다. 그 눈빛은 번개가 인간화된 현상이다. 그런데 변신하는 사람의 영혼은 온통 다른 생명체의 과거 삶으로 되어 있다. 그 삶은 증언되지 않으며, 스스로 자존하면서 유유히 흐른다. 거기에는 명중이라는 관념도 없고, 세상을 유익하게 하겠다는 욕망도 없다. 자아니, 무아니 하는 발상 자체가 없다. 생명은 그저 물그림자로서 언뜻 순간적인 무늬를 드리우듯 거기 머무르고 변한다. 아시아 북방의 춤 그리고 남방의 춤이 만나는 것은 그러한 눈빛과 그러한 변신이 서로 어깨를 걸면서 새로운 춤을 안무하는 행위이다. 

 

그럴 때, 춤은 이미 용틀임하면서 어디론가로 사람들의 운명을 안내할 것이다. 다른 곳에서 온 모든 용들의 기운을 그러모아 이 지구화된 세계의 부러진 축 너머로 각자의 삶의 축을 개별적으로 세우게 될 것이고, 각자 세우도록 촉발할 것이다. 거기에 안은미의 용신[龍神] 같은 무위지치[無爲之治]가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세상은 이미 변했고, 과거의 전범을 활용하지 않고 열려서 터져버린 미래를 새롭게 시간의 얼굴로 조형해나가야 할 단계에 처했다. 아시아의 용들이 거기 나타나고 개입할 시점이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