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n Eun Me

2020-08-12

2020 안은미 컴퍼니 신작

<A-드래곤> 프로젝트를 위한 천만번의 걸음

 

안은미

처음 이 지난한 작업을 시작하며 6 1일 서울로 입국하기로 한 아시아의 어린들은 자국에 갇혀 있었다. 수세기에 걸쳐 각자 다른 의미의 언어를 만들며 소통했던 전통은 대부분 아시아에서 각국의 고유한 문화를 알리는 신비한 몸짓으로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듯해 보였다. 근대에 발명된 전통이란 범주는 바깥과의
표면장력으로 저항하는 동시에 안쪽으로 자기의식의 윤곽을 만든 경계였다. 이제 사라지는 것들이 남기는 거대한 발자국의 주름을 연구하며 그 경계선의 깊은 뿌리를 재구성하려는 2020 <A-드래곤> 신작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 작업의 시작은이라는 상상동물의 여의주를 발견하면서 진행된 여행이 아니었을까. 그 여의주는 춤의 언어가 결정화된 형태라고 할까. 특정할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 속에 맴맴 맴돌면서도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범아시아 사람들과 함께 춤의 새로운 언어이자 언어 일반 —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는 신화적 의미에서의 언어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희미한 맹아의 형태로만 남아있고, 좀처럼 구체화되지 않던 계획은 갑자기 움이 트고 줄기가 뻗으면서 급진전되었다.

 

2018 11 작품 <Let me change your name> 인도네시아 자카르타(Jakarta)에서 개최되는 Indonesian Dance Festival 오프닝 공연으로 초청되면서 예기치 않게 꼬투리가 툭 터졌다. 오프닝 공연 하루 전날 독일문화원 극장에서 오프닝 갈라 공연이 이루어지는데, 우리 무용단은 그곳에 초대받아 가벼운 마음으로 공연을 관람했다. 인도네시아의 젊은 안무가의 짧은 분량의 작업, 유럽 안무자와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이 이틀간 계속되었다. 일본, 싱가포르, 중국, 타이완 등 서유럽 문화와 많은 교류가 있는 나라들과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했지만,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해석을 한 작업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무척 밝은 에너지를 주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러다가 <>라는 제목으로 펼쳐지는 어느 한 남자의 솔로를 보게 되었다. 무언가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그의 춤에 영감은 아직도 온전히 자기 세계를 작위적으로 만들어 나가지 않은 아주 강한 에너지를 보유하는 움직임이었다. 작품을 떠나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아시아 남방의 영적 감흥이 살아있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뉴밀레니엄에 태어난 아시아의 젊은 친구들과 만나서 작업을 해야겠다는 발상이 충동적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20세기의 강을 건너 새로운 시대에 선을 긋는 주름으로 태어났지만, “용의 여의주처럼 여전히 과거의 춤이 온축되어 있는 문화와 연을 맺고 사는 21세기의 몸들과 초시간적으로 만나는 것이 어쩜 전통과 현대의 짝짓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포스트 모던 이후란 서유럽 문명의 거대시계가 더 이상 시보를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시아의 춤들이 만난다는 것은용들의 결혼에 해당하는 연금술적 짝짓기라고 할까. 공연이 끝난 후 페스티벌 총감독인 마리아 다르마닝시(Maria Darmaningsih)에게 나의 생각을 들려주고 의견을 물어보니, 자기네가 기꺼이 돕겠다며 적극적인 협력의 태도를 보여줬다. 그 전율적인 공연으로 나의 마음을 온통 뺏은 젊은 남자는 씨코(Siko)라는 친구였는데, 우리 무용단의 <조상님께 바치는 땐스> 브라질 공연 투어에 극적으로 합류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이렇게 긴 여정이 출발되는 플랫폼이 서서히 만들어지고 그로부터 한발 한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오디션 공고를 주변 아시아 국가들에게 보내어 2000년생 무용수를 오디션 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했는데, 문제는 이 모든 무용수들의 나이가 어린 학생이라는 딜레마에 봉착했다. “용의 아이들은 국경선을
넘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다. 가령, 일본의 한 여자 무용수는 학교 휴학은 안된다는 부모님의 강권에 이 마음이 끌리는 프로젝트를 포기하게 되었다. 2020 6월부터 9월까지 서울에서 안은미컴퍼니와 함께 리허설 및 초연을 하고, 9 15일 곧바로 유럽 투어를 떠나 12월까지 함께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그렇다면, 한 학기 휴학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학업이냐, 동시대의 무대냐.


2000
년대 태어난 아시아의용의 아이들이 결정장애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동안, 우리는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직접 그 나라를 찾아가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답을 얻었다. <A-드래곤>은 수월하게 앉아서 책상머리 지리학자처럼 누가 떠먹여 주는 프로젝트가 될 수 없었다. 드디어 2019 9월 마리아 다르마닝시의
추천을 받아서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시립 예술대학(Institut Seni Indonesia Yogyakarta)으로 작품 프로듀서인 쟝 마리 샤보(Jean-Marie Chabot), 김혜경(안은미컴퍼니 단원)과 함께 설레이는 여행을 시작하였다.


더운 나라의 풍토와 기후가 연습실 등의 학교 건축술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면 자못 흥미롭다. 일단 궁전에 가서 전통 무용을 배우는 수업을 보면, 건물의 벽이 없고 양 끝에 기둥만이 지탱하고 있는 연습실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공간에서 휠체어에 앉아 매섭게 춤추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위대한 교사들의 연륜을
가늠해보면, 지나간 긴 세월 그들이 춤에 헌신했던 무한한 애정과 신념을 느낄 수 있어 가슴이 뭉클했다. 어쩌면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전통이때의전통은 근대의 상상된 발명이라는 조건을 훌쩍 뛰어넘는다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그 모든 역사의 바디랭귀지가 시간의 파괴력에 저항하면서 21세기에 어떤
언어 일반의 존재로서 여전히 우리에게 전승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물음으로 이어진다. 한국이라면 어떨까. 한국에서는 근대화라는 것이 곧 서구화를 뜻했고, 그 노도와 같은 잔혹한 변화는전통의 폭력적 파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승인되곤 했다. 이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반에 걸쳐 무용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문화 지형의 지도가 달리 그려진다는 것을 뜻했고, 그것은 왠지 자명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 거대한 잠식은 정보기술과 미디어에 의해 구축된 거대한 세계 공동망에 의해 더 이상은 그 전통적인 몸의 움직임 언어가 온전히 그들의 것으로 남아있지 않고 곧 소멸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하에서 남아있는전통역시 유예된 것이고, 잔존하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일방향적이기만 한 것인가.


오디션을 위해 학교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 뜨거운 태양열만큼 강렬한 눈빛으로 우리를 신기하게 반기는 학생들을 만났다. 그러면서도 아직 어려서 그들은 수줍음을 머금은 눈초리로 이방인들을 맞이한다. 무용수 김혜경의 시범으로 움직임을 배울 때, 그들이 흘리는 비지땀을 보며 나는 나의 1980년대쩍 얼굴이 떠올라
잠시 추억에 잠겼다. 현대식 교량처럼 그러한 추억으로 그들과 연결되었다.


드디어 우리는 뉴밀레니엄에 태어난 한 무용수를 선택했다. 그의 이름은 아지(Aji). 할머님, 어머님이 모두 무용하는 집안의 유전자를 받아서인지 아주 단단하고 깊은 중심을 가진 청년이었다. 앞으로 영어를 더 공부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우리는 그 뜨겁고 순수한 곳을 떠나왔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오디션 경험을 바탕으로 2020 1월 우리는 일본,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등 네 나라의 여정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그 여정과 체험의 기록을 위해 카메라도 함께 동행하고 다른 분야의 시각도 참여하여 여행을 출발했다.

 


일본에서

일본은 내가 이미 3번 정도 여행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특별한 긴장감은 없었으나 짧은 시간 속에 많은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현지의 재일교포 무용가인 성애순 선생님의 도움으로 교토에 도착해서 일본무용의전통을 접할 수 있었다. 소위 일본무용 5대유파(日本舞踊 五大流派)—즉 하나야기류
(花柳流), 후지마류(藤間流), 니시카와류(西川流), 반도우류(坂東流). 와카야기류(若柳流) 중에 하나인 와카야기류(若柳流)의 춤을 전승하신 와카야기 누이슈우(若柳縫秀) 대선생(大先生)의 스튜디오를 방문해서 특별 지도를 받기로 했다. 도착했을 때, 따님인 와카야기 킨슈우(若柳錦秀)도 함께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두 분은 기모노를 입고 특유의 가볍고 정중한 미소로 우리를 조그마한 공간으로 안내했다. 그 공간에서는 오랜 시간 거대한 고목처럼 하나를 반복하며 생을 지켜낸 사람에게 느껴지는 결이 감돌고 있어서 순간 숙연해지는 침묵을 음미할 수 있었다. 슬하의 따님이 여럿 있는 가운데 오직 둘째 딸이덕성의 여인으로서
어머니의 춤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우리 무용단의 무용수들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차분히 춤의 형식이 갖는 대화의 언어를 가르쳐줬다.


처음은 절하는 예법인오지기(お辞儀)’를 설명했다. 두 손을 모으고 내 머리 위 정수리에 있는 자기 영혼을 보여주면서저는 괜찮은 사람입니다라는 의미로 상대방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는 동작이 맨 처음 시작이었다. 일본 춤의 시작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부호처럼 모든 동작에 이름이 있고 형태가 있다. 부채 하나로 경계의 이곳과 저곳을 나누고, 소나무의 자태와 거북이의 움직임이 만들어지고, 이 하나의 언어가 마치 여러 동물들의 요소로 구성된의 퍼즐처럼 맞추어져서 마치 TV화면 같이 종합적으로 시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교토의 오래된 절 저 안쪽 공간의 벽에는용의 벽화가 거대한 규모로 그려져 있어 그러한 메시지의 진원지를 다시 가늠해볼 수 있게 했다.


우리 무용단의 무용수 5명은 아시아 전통춤을 현장으로 직접 찾아가 그 문화적 환경을 느끼는 것과 함께 배우는 기회가 처음이라 그 눈빛이 아주 남다르게 반짝거렸다. 누군가를 직접 만난다는 것은 그 서로간의 단절을 이어주고, 그로부터 맺어진 연결고리는 상호기억이라는 깊숙한 공동의 메모리에 안착되어 진한 잔영으로 맴돈다. 맴돈다는 것은 음미되면서 내면에서 다시 체화되는 과정의 일부이리라.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두 분 앞에서 즉흥으로 춤을 추면서 우리의오지기를 대신 갈음하고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약속하며 떠나왔다.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정리된 거리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기념비적 저작 <숨겨진 차원>에서 이거리를 문화의 풍토와 고유한 틀의 척도로 생각했다를 마주하니, 방금 배우고 나온 춤의 단아하고 절제된 움직임도 모두 다 사통팔달 연결되어 문화의 일관된 속성처럼 느껴졌다.


일본은 어떤 의미에서든전통이라는 높은 수준, 차이의 문화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탈아입구라는 모토는 줄곧 있었지만, 아시아에 젖줄을 대고 있는 저변의 기층문화는 대중과 함께 향수되고 있어서 생명력이 현재진행형이다. 가령, 일본의 가부키는 아직도 일본 공연문화 시장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고,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공연을 보기 위해 예매를 시도해보지만, 높은 티켓 가격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조기 매진되어버리는 사태가 반복되었다.


다음 날 신칸센을 타고 요코하마로 가는 도중, 수많은 우편엽서와 우키요에에서만 봤던 후지산의 설경을 마주하자 그 너머 비치는 태양과 함께 장중한 자태를 뿜어내는 장관이 우리를 마중했다. 자연의 빛나는 아름다움과 생명의 애니미즘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짝이 된 것 같았다. 이윽고 도착한 요코하마는 일본이 자랑하는 항구도시로서 아시아 현대무용이 젊은 안무가들 중심으로 경쟁력있게 발돋움할 수 있도록 중요한 플랫폼을 마련한 요코하마 예술재단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재단의 예술감독인 신지 오노(Shinji Ono)를 만나기로 한 요코하마 레드 부릭 웨어하우스(Yokohama Red Brick Warehouse No.1)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한국의 젊은 무용가들을 많이 발굴하고 아시아 현대무용의 동반 발전을 위해 오랫동안 애써온 신지 오노 감독이 이번에는 우리의 신작이 깊은 관심을 드러내며 요코하마로 초대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나의 <A-드래곤> 신작 오디션을 위해 물심양면 많은 협력을 해주었다. 그날 우리는 멀리
도쿄에서 오디션을 보러 달려온 쿄오코 와타나베(Kyoko Watanabe)를 만났고, 그곳에서 배려해 준 스튜디오에서 집중적으로 오디션을 봤다.


일본의 현대무용은 춤의 복합적인 결과 올을 드러내는데, 이는 가부키라는 전통적인 양식 위에 제2차 세계대전 후 발생한 특유의 부토 그리고 서양의 발레라는 몸짓언어의 합류하는 흐름 위에서 다시 개인의 기초적인 표현의 언어를 표출한다. 대학교 1학년생인 쿄오코 역시 이런 흐름 테두리에서 대부분의 움직임이 안정성 있는 단단한 움직임의 어휘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가능성을 엿보았지만, 오디션 이후 도쿄로 가는 열차를 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쿄오코는 학교를 휴학하는 것이 상황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고 고백했다. 어린 나이에 학업을 잠시 유보하고 불쑥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여정을 쉽사리 결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그녀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지만, 예술가의 자아를 가진 똑같은 우리들에게는 가끔 낯선모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도쿄에 도착해 DDC(Dewandaru Dance Company)의 리안또(Rianto) 예술감독에게 인도네시아 전통무용을 수업받기로 되어 있었고,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그는 일본 무용수와 결혼해서 일본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무용중에 발리 지방, 특히 힌두교 문화에 영향받은 독특한 춤을 추었다.


발리의 전통춤은 성스러운 춤, 부분적으로 성스러운 춤,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오락을 위한 춤, 이렇게 세 가지 장르가 있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고. 풍습, 종교적인 가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의상도 화려하고 성별이 나뉘어 그 캐릭터에 맞추어 춤이 전승되고 있다. 음악 반주는 가믈란(Gamelan, 인도네시아 타악기)으로
연행한다. 커다란 두 눈의 표정으로 행복·슬픔·분노·두려움·사랑 등을 표현한다. 일본 춤에서 부채가 상징적인 매체였다면 발리 춤에서는 스카프가 언어를 만들어가는 큰 동작이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 아시아 무용에서 성별이 나누어 있듯이 인도네시아 무용에도 그러한 흐름을 볼 수 있다. 젠더라는 이슈에 비춰볼 때, 이 성별은 새로운 성차의 재구성으로 변화할 여지가 많았다. 좌우간 리안또는 아시아 안무자로서 사라지는 자바(Java) 전통춤을 이어가려는 노력과 함께 새로운 작업을 지속적으로 펼쳐가면서 주목받고 있었다. 그의 큰 눈을 바라보면 그의 꺼지지 않는 뜨거운 열정이 느껴진다. 특히 그가 추는 자바 전통춤(eling eling Banyumasan, “남성이 여성으로 변신하며 추는 춤”)은 압도적인 변신의 에너지가 있었다.


우리 무용단은 도쿄에서 요요기 공원의 스트리트 댄서들을 찾기 위해 언어도 통하지 않는 도쿄 시내를 걸어 다니며 낯선 젊은이들에게 우리 프로젝트를 설명하며 오디션의 참여를 권했다. 어린 청년은 오겠다는 약속을 하며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길거리에서 만난 한국인들의 뜬금없는 제안을 믿을 수 없었을 수도 있겠다. 일본의 여정은 짧은 스케줄에 여러 도시를 오가며 진행해야하는 리서치라 무용수 2명은 A형 독감이 걸려 정말이지 신체적으로 너무 어려운 환경을 겪었다.

 

말레이시아에서

2020 1 20일 월요일, 우리는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로 향해 날아갔다. 1월이지만, 겨울에도 30도를 웃도는 열대우림 기후의 나라로 떠나는 것이 위도 40도 언저리에 사는 우리로서는 진기한 경험이었다. 여행 전 우리는 미리 문화유산 국립대학(National Academy of Arts, Culture and Heritage)의 쟘주라이 자하리(Zamzuriah Zahari) 교수에게 연락하여 그녀의 도움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말레이시아 전통무용을 전공한 그녀는 우리를 오래된 친구처럼 맞이해주었고 외부인에 대한 어떤 경계심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친근한 그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같은 대학에서 사원의 전통무용을 가르치는 파티마흐 압둘라(Fatimah Abdullah) 교수는 그녀의 아버지도 뛰어난 무용수였는데, 너무 어려운 삶의 상황에서도 아버지가 춤을 중단없이 이어가신 것을 보고 그녀 역시 강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춤에 임하게 되었다고 했다. 커다란 눈과 색조 화장을 한 그녀의 눈은 자기가 힘겹게 이 전통춤을 이어가는 것에 대한 자긍심을 말해주고 있었다. 특별히 우리 무용단의 무용수들을 위해 수업을 진행해주었는데 특유의 노래와 함께 앉아서 추는 춤이었다. 멩가답 레밥(Mengadap Rebab) 춤은 막용(Mak yong)이라는 종합적인 고전극의 오프닝에 추는 춤인데, 춤 자체가신에 대한 찬가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소리인 정가와 비슷한 에너지의 톤인데, 소리가 훨씬 더 애잔하고 힘찼다.


내가 파티마흐 압둘라(Fatimah Abdullah)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무용단원들은 사하 사디 빈 하심(Sahar Sa’di Bin Hashim) 교수에게 말레이시아가 자랑하는 전통 무술인 실랏(Silat)을 배우고 있었다.

 

실랏은 과거 국왕의 최정예 호위 무사들이 사용했던 말레이시아의 전통 무술인데, 그 기본뼈대는 무용언어로 재구성되어 전해 내려온 독특한 무술이었다. 그래선지 움직임이 아주 격렬하면서도 절제된 감각이 탁월했다. 땀이 비오듯이 흐르는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말레이시아에 온 목적을 달성했다. 즉 우리 프로젝트
<A-드래곤>에 참여할 무용수를 찾아낸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사이히다 (Nur Syahidah Binti Hazmi).

 

아주 똘망똘망한 친구로 몸에서 표현되는 힘이 아주 단아하면서도 한치의 허점도 용납하지 않는 단단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수업을 마친 후, 우리 무용단의 레퍼토리 동작을 가르쳐주었는데, 어린 학생들은 그 낯선 동작이 품고 있는 또다른 형태의 영적 감흥과 전자적 사이키델릭에 대해 아주 폭발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아마 아시아 남방에서도 기세를 떨치고 있던 한국의 K-POP 인기로 인한 영향 역시 없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다. 인도네시아의  대학 캠퍼스에서도, 말레이시아의 대학 캠퍼스에서도 한국 아이돌의 춤을 추는 풍경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스페인 공연을 갔을 때도 너른 마당에서 열린 젊은 친구들의 K-POP 댄스파티를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말레이시아는 전 세계에서 42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그 나라 안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재뉴어리(January) 선생은 말레이시아인이지만 그 뿌리는 인도네시아에 두고 있었으며 인도 오리사 주에서 발원한 인도의 대표적인 전통무용 중의 한 갈래인 오디시(Odissi) 춤을 전수받고 계승하고 있는 무용수였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오디시는 인도의 8가지 유형의 고전 무용 중의
하나로서 대개 고대의 힌두사원에서 신을 찬양하기 위해 신전 무희들이 추었던 오래된 춤이라고 했다. 인도에서 은 흔히 용왕으로 표현되었는데나가’(Naga)라고했다. 또한 용궁부인으로서 그 여성형은나기니’(Nagini)라고 했다. 이 두 마리 용은 중국의 복희와 여와처럼 서로의 몸체를 새끼꼬기 하듯 서로 휘감고 있었다.

 

좌우간 인도 동북부에 위치한 오리사(Orissa) 주의 신전에서 발원한 이 춤은 직선적인 움직임과 딱 딱 끊는 느낌이 많은 인도의 여타의 고전 무용과는 달리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적인 몸짓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몸의 마디마디가 다른 방향으로 어긋나게 움직였는데, 사원 건축에 새겨져 있는 서사시의 주인공 부조의 자세와 형태를 모티브로 해서 그러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수업 마지막에는 오디시 음악에 맞추어 우리가 전부 즉흥춤을 선보였는데, 재뉴어리(January) 선생은 너무도 좋아했고 우리 무용단의 적극적인 참여에 즐거움을 표현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말레이시아에서 직업 무용단으로 독립된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아스크 댄스컴퍼니(Ask Dance Company)를 방문했다. 이 댄스컴퍼니는 2011년 죠셉 곤잘레스(Joseph Gonzales)에 의해 창단되었다. 그 무용수들 중에서 한 명은 한국 프로젝트에 참여한 친구도 있어서 우리의 프로젝트를 비교적 빨리 이해했다.

 

인구 대비로 보면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인도네시아인은 적지만 전통춤을 고수하고 전승하며 춤추는 사람은 많은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우리 모두 1년은 한 나라에 거주하며 머물러야 모든 문화적 정보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체득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도 서둘러 짐을 챙겼다.

 

 

태국에서

2020 1 25일 토요일. 태국(Thailand)에 도착했다. 태국의 역사는 아시아 남방에서 독립국가의 전통을 잘 지켜왔고, 그 바탕은 불교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불교가 국가의 중심인 국왕을 떠받치고 있는데, 태국 국기는 이러한 태국의 정치문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 청색은 국왕을, 백색은 불교를, 그리고 적색은 국민을상징하는 것이 타일랜드 국기다.

 

태국의 고전무용이나 연극, 음악 등은 그 젖줄이 인도로부터 전래된 것인데, 고도로태국화한 것이라고 한다. 앙코르 문명을 언급하는 학자들도 태국무용을 인도지역에서 이동한 문화의 변형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인도 지역에서 서사시와 신화가 함께 전래된 무용은 앙코르 문명국들에서는 각각 궁중무용으로 발전하여 극도의 파인아트가 되었고, 그 세련된 예술성이 극히 높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마 태국무용이라고 하면, 아주
유연하게 휘어지면서 특유의 손동작을 극대화하는 움직임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태국 현지에서 느낀 점은 인도 신화의 왕 라마의 일대기인 서사시 <라마야나 Ramayana>에 기반을 둔 이야기를 구현해 낸 전통춤(Khon)’이 그 손동작의 몸짓언어가 특별하다는 것이었다.

 

현지에서 전통춤의 마스터이면서도 현대무용의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는 로나롱 캄파(Ronnarong Khampha)의 자택으로 초대되어 태국 국립대학의 무용과 교수와 그의 학생들의 직접 춤추는 시현을 곁들인 특별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엄격히 구분된 남성의 춤과 여성의 춤, 그리고 악마의 춤과 원숭이의 춤. 이 춤들이 왕실을 배경으로 다루어지다 보니, 움직임이 상당히 상징적이고 절제된 기호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머리의 관과 의상의 디테일에 있었다. 그 교수는 직접 우리 무용수들에게 의상 입을 기회를 주었는데, 착용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며칠 후, 파타야에서(Khon)’을 주제로 대극장에서 엄청난 스케일로 제작된 공연을 보았는데, 아마도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타일의 현대극으로 만들려고 시도한 듯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통의 현대화가 빚어내는 시각적 스펙터클 공연이 그렇듯이 숭고한 주제의 전달보다는 기술적 완성도에 치중되다 보니, 정말로 전달되어야 하는 코어들은 어디론가 달아나고 이야기의 영혼은 생략된 느낌이 들었다.

 

쌀라 찰름끄룽 (Sala Chalermkrung) 황실극장에서 보여준 콘(Khon)가면 무용극도 60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출연했지만, 그 현대화의 시도가 빚어낸 공연에서 압도적인 것은 그 시각적으로 변형된 몸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음악이 주는 강렬함이 더 원초적이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음악은 전통의 신령한 에너지가 살아있었고, 춤은 점차 문명화의 길을 걷고있는 도중이었다.

 

이후, 프랑스 문화원에서 현지 무용인의 애환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필름 <스텝 Step>을 관람하면서 비로소 태국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필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전통에 기반한 현대무용을 지탱하려는 젊은이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잔잔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춤들이 갖는 명운은 그와 비슷한 궤적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일방향적 흐름의 반작용으로 뉴밀레니엄의용들은 다시 하늘로 날아오를려고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분명했다. 물극필반[物極必反], 상황이 극에 달하면 그 반대로 바뀐다는 것이다.

 

태국으로의 여행 목적은 표류할 뻔했다. 그러던 차에 다행히도 비보이 전공자 라챠싹 왕(Ratchasak Wong)의 도움으로 DD Flection이라는 댄스그룹 멤버들 중에서 2000년생의 춤꾼 헤리(Harry)를 만나게 되었다. 비보잉과 팝핀 그리고 고난도 아크로바틱 기술을 사용해 작품을 만드는 이들 DD Flection의 춤은 섬세하면서도 절도있게 파워풀했다. 그런데 오디션의 적임자로 생각된 헤리는 이미 또다른 시험 목전에 처해 있었다. 이번 연도에 군대에 입대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처지를 들려줬다. 법없이 살아가는 거리의 방랑자처럼 세상 근심없는 듯한 여린 미소를 띠고 있는 이 청년을 꼭 다시 만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그 자리를 떴다.

 

우리 일행은 파타야(Pattaya)에 도착해서 산호섬 꼬란(Ko Ran)에서 포스터 촬영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짧은 일정이지만 서둘러 섬으로 들어갔다. 해변을 이동하려고 지도를 펼치며 두리번거리는데, 트럭을 개조해서 버스도 아니면서 14명을 모두 승차 시킬 수 있는 썽태우라는 자동차를 탔다. 승차석이 모두 오픈되어 있어 더운 기온에 덩달아 오른 체온을 바람에 식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곳에서도 가려고 하는 목적지를 소통하고 요금까지 흥정할 수 있는 바디랭귀지는 아주 유용하게 작동했다. 아시아는 또 다른 언어가 있었다.

 

물 속에서 계속되는 3시간의 촬영에 우리 피부는 빨갛게 부풀어 오르고 바위에 피부가 긁혀서 상처투성이가 됐다. 이런 곳은 휴가로 와야 하는 곳이었다. 더위와 허기로 지친 우리는 꼬란(Ko Ran) 섬에서 마지막 보트로 이동하여 파타야(Pattaya)로 나왔고 이내 방콕으로 향하는 고속버스를 탔다. 빠듯한 일정 속에서도 임근준((미술.디자인이론/역사 연구자)의 아시아 미술 강연과 함께 총 8일 동안의 리서치 여행은 쉼없이 이어졌고, 짧은 기간 동안의 이동과 미팅, 정보 공유, 학습, 정신과 육체가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 초고도의 시간 경험을 했다.

 

포화상태의 정보 과잉으로 녹초가 될 무렵, 세상에는 우울한 소식이 타전되었다. 다름 아닌 우한에서 발원한 코로나19 바이러스 뉴스가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심각한 사태로 발전될 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다음 여행지였던 베트남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고.

 

 

터키에서

2020 218일 무거운 마음을 안고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까지 아시아를 제외한 지구촌 곳곳, 특히 유럽은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이던 시기였다. 우리는 예정된 일정대로 벨기에. 프랑스, 스위스를 거쳐 마침내 유라시아 동쪽과 서쪽이 오랫동안 문화교류 했던 보고이자 살아있는 역사의 땅 터키로 향했다.

 

터키의 정식 명칭은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이고, 한자어로 옮기기는 토이기(土耳其)라고 한다. 투르크(Turk)족이었을 때는 돌궐(突厥), 철륵(鐵勒)으로 한역되었다.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헤게모니를 다투었던 투르크 유목민들은 4세기 말 대이동을 시작하여 아시아 서부로 옮겨갔다. 현재 지중해 및 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안선의 길이는 7,200km인 해양 국가이다.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 (Ankara) 이지만, 우리는 도시 이스탄불로 행선지를 정했다. 이스탄불은 과거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고, 동서양의 조화가 아름다운 모습을 갖춘 묘한 신비를 지닌 도시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하여 오랜 시간 상업과 문화의 교류의 요충지의 역할을 했다.

 

호텔에 도착하니, 첫마디가 “Korean?”이라며 아주 반갑게 맞이한다. 그곳에 안내를 도와준 친구 야렌(Yaran)의 설명으로는 터키인들은 금방 친구가 되는 민족성이 있는데, 다만 친근감이 너무 빨리 생겨 말이 많은 게 탈이라 했다. 더욱이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기억이 그들이 우리를 더욱이친구라는 의미로 반긴다고 말해줬다.

 

재미있었던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음식은 케밥이 아닌 뒤름(Dürüm)이었다. 이것은진짜 케밥 고기를 굽는다는 의미이고, 그 종류만 해도 수백 가지가 넘는다고 했다. 과자나 사탕, 초콜릿 등 아주 단 디저트도 인상적이었고, 특히 터키 커피로 인식하는 독특한 풍미는 커피 주전자에 커피 가루와 설탕을 함께 넣어 끓여서 맛과 향이 진하다. 이슬람 문화는 알콜이 허용되지 않는 가운데 차 문화, 하맘이라는 사우나 문화가 유난히 발달했다. 그리고 유럽과는 가까우면서도 바디랭귀지에서 차이가 있었다. 가령,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오케이 표시하는 제스처가 욕이 된다. 지리적으로 독특하게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의 언어의 인식구조가 아주 다르다는 것을새삼 느꼈다.

 

여기서는 벨리댄스(Belly dance)와 세마(Sema)라고 불리는 춤이 유명하다. 벨리댄스는 상체와 골반의 움직임을 강조하여 자유롭게 추는 춤이다. 신체의 부분마다 나누어 사용하는데 원운동을 중심 주제로 이루어진다. 음악에 맞추어 자유로운 즉흥을 출 때면 마치 팝핀 댄스의 파워를 느낄 수 있다. 현대 여성의 마른 체형을 중시하는 무대 공연에 비해 풍만한 여성의 신체를 중요시하게 여겨 모성애와 탄생을 표현하는 춤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미국의 현대무용가인 루스 세인트 데니스 또한 중동의 춤에 영감을 받은 무용가였다. 특히 춤에 대한 세인트 데니스의 접근 방식은 서양의 춤인 발레의 맥락에서 외국의 춤인오리엔탈 댄스를 혼합한 것이 특징이었는데, 그의 목표는 관객들로부터 보다 뛰어난 경이감을 끌어내기에 적합한 춤을 창조하는 데에 있었다. 이는 20세기 초반의 서양 사회에서 여성 무용가는 이슬람 세계와 마찬가지로 도덕성이 부족한 존재라고 판단하여 백안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피 댄스는 이란의 시인 메블라나 잘랄루딘 루미가 창시한 신비주의 의식으로서의 춤이다. 한쪽 팔은 하늘을, 다른 한쪽팔은 땅을 향하고 팽이처럼 빙글빙글 돈다. 손 뻗은 하늘에서 우주와 합일을 이루고, 발 디딘 땅을 향해 우주적 사랑이 흘러든다는 뜻이다. 쉬지 않고 돌다가 문득 티끌 같은 자아가 광대한 우주에 포개지는 무아지경의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보는 춤보다는 의식의 춤이다.

 

우리를 안내해주던 야렌(Yaran)은 이스탄불의 소아시아 지구에서 나서 자랐다. 이 지역은 페리선을 타고 왕복하는데, 선상에 서면 수천 마리의 갈매기가 승객이 나누어 주는 빵을 낚아채려고 하는 비행은 아주 본능적인 감각의 산물이다. 이 비행의 다이내미즘과 속도는 한 편에 잘 짜여진 안무 작품과도 같다. 수평선의 캔버스 위에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무음이 역설적으로 합창곡 같은 인상을 받는다. 구시가지처럼 조금 더 외진 전통 구역과 규모가 아기자기한 식당이 주는 정겨움, 사람사는 분위기의 걸음들은 음률이 경쾌하다.

 

터키에서는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 듯 역사로 탐닉하기 시작한다. 1453년 정복자 메흐메드(II. Mehmet, 1432-1481)의 통치이후, 이슬람의 모스크로 개조되고 요새화되어진 동방정교회 소피아(Saint Sophia)거룩한 지혜라는 뜻이고, 그 주변 몇 세기 동안 그 문화를 번영시키고 이룩한 사람들의 노동의 역사도 함께 느껴졌다. 그러나 그 여행은 점차 불안과 초조가 그림자처럼 따라붙기 시작했다.

 

터키의 이스탄불이 주었던 숨 막히는 북적거림과 함성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프랑스를 경유해서 서울로 도망쳐 왔다. 정다운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 터키인들의 “Are you Korean?”바이러스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우리가 공항을 나오려는 순간, 터키는 경계령을 내렸다.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왔다.

 

아마도 범아시아의 뉴밀레니엄용들의 사슬세우기를 하려는 <A-드래곤>은 앞으로도 긴 여정을 예정하고 있지만, 잠정적인 끝은 예기치 않은 바이러스로 인해 문화의 연결을 지어주던세계는 하나다라는 경계 없는 장벽을 다시 나누고 있다. 이 팬더믹(pandemic) 쇼크 사태를 맞이하여 <A-드래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아시아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소통해야 하는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정비된 국경의 등고선을 넘어설 수 있는 문화적 소통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몸의 느낌의 소통을 넘어서는 다른 소통을 재발명해야 하지 않을까. 어려운 긴 여정을 떠날 때의 무엇인가를 안다는 마음은 문득 모든 것이나는 모른다라는 겸손 속에서 다시 뉴밀레니엄의 아시아용들에게 그 희망을 걸어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으로
진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