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비극적일 댄스 <사심없는 땐쓰>의 전말 – 서동진

안은미 컴퍼니가 두산아트센터와 다시 손잡고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의 후속 프로젝트를 준비한다. 한국 현대 무용의 가장 빼어난 안무가일 안은미는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시작하며 마치 인류학자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다. 그녀가 온 나라를 누비며 할머니들의 몸을 답사하더니 이제는 아이들의 몸을 향해 나아간다.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는 현대 무용의 지배적인 추세에 역행하는 어깃장 그 자체였다. 그것은 최근의 현대 무용이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 던“몸”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능청맞게 다른 길로 접어들어 이야기를 건네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얼 핏 보기엔 할머니와 그들의 몸이란 주제가 당장 너 무나 패셔너블해 보이는 데다(실은 안은미의 무용 은 상당히 패셔너블하고 그녀 역시 그걸 떳떳이 즐 긴다),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이 소박하고 어쩐지 싱 거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관절 무슨 일을 꾸 미고 있을까. 사실 현대 무용에 조금이나마 식견이 있는 이라 면, 몸이란 말을 듣자마자 옳거니 하며 거창한 장광 설을 늘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요 얼마간 현대 무용이 가장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주제가 있 다면 바로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몸 에 대한 관심은 어떤 편향에 기울어 있는 것이었다. 현대 무용이라고 지적인 풍향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대한 관심이 비스듬한 편 향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내가 만 나본 무용평론가 가운데 들뢰즈라는 프랑스 철학자 에 열광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들 뢰즈 같은 철학자가 애지중지했던 개념 몇 덩어리를 가미하며 신나게 몸과 무용의 관계에 대하여 장광설 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런 몸짓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고 어설픈 냄새가 풀풀 난다. 심지어 내게는 그런 허풍이 무용 의 위기를 애써 감추려는 알리바이에, 차라리 가까 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때 유행했던 철학적 주 장들은 근대사회가 만들어낸 형이상학적인 신체, 이 를테면 데카르트적인 이분법이 상상한 의식의 외부 로서의 몸이란 생각에 반대하는 것이 철학의 의무인 것처럼 법석을 피웠다. 그리고 이는“언어로서의 무 용”이 시들해질 무렵 찾아온 호재가 되어주었다. 현 대 무용 역시 몸의 담론에 동승하면서 새로운 자리 를 찾으려 하였기 때문이다. 춤의 숨겨진 인식론 가운데 하나는 사회가 만들 어내는 몸의 원리에 대항하는 어떤 사고를 제안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무 용 자체가 언제나 사회가 규정하는 몸의 규율을 상 대하려 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대무용은 아름다운 몸짓을 선별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런 심미적인 몸짓을 상연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무용 의 외부에 자리하고 있던 사회적 신체를 무용이 사 유하는 직접적인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런 원리로 인해 실은 현대무용은 말 그대로 자신을 현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무용의 한 복판에 는 언제나 이처럼 사회적인 신체로서의 몸에 대한 관 심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안은미의 새로운 프로젝트는 상당히“정통파”라 불러도 좋을 것 이다. 그것은 그녀의 춤에 대한 세간의 인상과 많이 다 를 수 있다. 그녀는 외려 한국 현대 무용에서 아주 이 단적인 인물인 양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녀 가 현대 무용의 외곽 지대에서 주변적인 언어들로 말 을 건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외려 그녀의 춤은 현대 무용의 집요한 근본적인 질문을 겨 냥하고 또 그에 답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그녀가 시 도하는 몸의 인류학적인 탐색 역시 그를 통해 의미를 헤아려야 한다.

 

아이들이 멍하니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한다. 그 위엔 초현실적인 몸을 거느린 아이들이 판박이 같은 미소 를 띠고 하체를 흔든다. 아이들은 꼼짝 없이 자리에 앉 은 채 신기루 같은 몸을 응시한다. 아이들의 몸이 허공 에 두둥실 떠올라 세계 곳곳으로 날아간다. 아이들이 두꺼운“노페(의류 브랜드 노스페이스를 청소년들끼리 부르는 은어)”를 입고 우르르 몰려간다. 깡총하게 길 이를 줄인 날렵한 교복바지 위에서 빨갛고 노란 노페 무리가 흔들린다. 그 두터운 점퍼 안에는 어떤 몸이 숨 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몸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러나 그것을 모르고서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 엇인지 헤아릴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아이들이 잠겨있는 몸의 세계를 헤아리 지 않고도 아이들의 삶을 판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면 그것은 코미디일 것이다. 이 때 말하는 코미디란 단 지 드라마의 장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코미디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미처 짐 작할 수 없을 때, 눈에 띄는 어떤 흠이나 결점을 조롱 하며 그것으로 자신이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좌절감 을 눈가림하려는 처량한 몸짓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 로‘개그콘서트’는 현실에 아주 비판적이지만 조롱의 코미디에 머문다. 물론 웃음은 세계를 인식하는 데 따 르는 고역스런 부담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도록 돕는 다. 한 번 웃고 나면“세상이 왜 이런 거야?”하는 질 문은, 퍽하고 꺼진다. 그래서 코미디는 항상 위험하 다. 그런데 그 현실의 희극이 예술에서의 비극으로 전 환될 수 있다면? 미학 이론의 상식에 따르면, 비극이 란 헤아릴 수 없는 세계를 헤아리려는 행위 그 자체이 다. 따라서 결국은 이미 짐작한 대로 뻔한 결말에 이르 는 것처럼 보이더라도(사랑의 상실, 혁명의 실패 등은 비극의 단골 플롯이다), 비극에서의 핵심은 그 결말이 아니라 그 모든 사태를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에 따라 집요하게 추적하고 확정하려는 행위 그 자체에 있다. 그렇다면, 실은 우리가 그녀의 춤을 보며 한참을 웃 고 즐기는 동안, 안은미는 그 코미디의 뒤편에서 비극 을 숨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몸의 인류학적 정치라 부를 만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무용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그 때 그녀가 상 대하는 몸이란 흔히 우리가“몸담고 있다”고 말할 때 의 그 몸이다. 그 몸은 바로 특정한 삶의 자리에서 발 생하고 펼쳐지는 사회적인 몸이기 때문이다. 군인의 몸, 학생의 몸, 엘리베이터 걸의 몸, 노인정 할머니의 몸 등은 말 그대로 담겨져 있는 몸, 사회적 신체로서 의 몸일 것이다. 안은미는 이런 몸을 사유하면서 현대 무용이 가진 춤에 관한 미학적 결벽을 통렬히 비판한 다. 현대 무용은 세상에 넘쳐나는 다양한 춤을 마치 세 상에 없는 것처럼 도외시하여 왔기 때문이다. 카바레 에서, 댄스클럽에서, 콜라텍에서, 회갑연에서, 마을잔 치에서, 수학여행에서, 신입생환영회에서 우리는 춤을 춘다. 동네 체육관에서 에어로빅을 추고, 길거리에서 비보잉을 하고, 유치원에서 율동을 추고, 무엇보다 온 종일 텔레비전 화면 위에서 걸그룹과 보이밴드가 춤을 춘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춤들이 세상을 채우고 있지 만 현대 무용은 그로부터 자신이 오염되지 않도록 전 전긍긍하였던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행여 그에 호 의를 보일 때에도 그것은 대중문화를 인용하는 세련된 미학적인 장치로 생색을 내는 것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안은미의 춤이 그런 현대 무용의 자세를 부 정하려 격렬히 분투하여왔음을, 그녀의 춤을 아는 이 들은 모두 알고 있다. 현대무용의 자폐적인 정체성으 로부터 벗어나도록 거의 모든 몸짓을 춤의 언어로 등 가화(等價化)하려는 것, 그것은 실은 안은미의 무용이 가진 중요한 미학적 정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심 없는 땐쓰>가 시작된다. 이는 그 녀가 한국 사회의 서로 다른 계층의 몸들이 어떻게 춤 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고 반성하고 실현하는지를 인류 학적으로 관찰하고 그것을 다시 춤의 드라마로 구성하 는 작업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우리에게 웃음을 줄 지라도 그것의 뒤편에 비극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잊 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상님에게 바치는 댄스>가 한 국 현대사의 곡절 속에서 여성의 몸은 어디에 있었는 가를 알려주었듯이, 이제 그녀는 <사심 없는 땐쓰>를 통해 십대의 몸을 읽고 상연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시대에 몸이 놓여있는 자리, 그 전모를 그려내려 한다. 비극의 결정적인 미덕이 바로 전모를 그려내는 것이라 면, 그녀의 무용은 바로 그 때문에 비극이다. 그것은 우리를 웃고, 들썩이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그 웃음이 발원하는 세계를 응시하게 한다. 그녀의 무 용이 온전히 비극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안은미는 인류학의 기본적인 공정에, 거의 본능적으로 밝은 것처럼 보인다. 정신분석학은 정신분석의가 분석 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심적 고통만으로는 충분 치 않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깐깐한 프로이트의 추종 자들은 반드시 예비상담을 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분 석을 받게 된 환자가 분석자를 바로 자신의 욕망을 뒤 흔들어놓는 어떤 인물로 간주하지 않는 한 분석은 절 대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정신분석에서는 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 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법정에서 피고가 자신의 죄를 심판하는 법관을 법의 목소리로 간주하지 않은 채 그를 룸살롱에서 젊은 여자를 주무르고 뇌물을 밝 히는 시시껄렁한 인물일 것이라고 상상하는 한, 법의 세계는 위기에 처한다. 설령 그 판사가 상상한 대로 정 말 그런 자였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 때 우리는 판사 앞에서 저절로 자신의 고개를 조아리며 그의 언도를 들을 때, 피고가 판사와 맺는 관계 역시 전이에 해당된 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절차는 인류학 자 역시 비슷하게 따른다. 인류학자는 자신이 분석하 는 사회의 사람들과 이른바‘라포(rapport)’라고 부르 는 것을 맺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조사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을 맺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이 분석하 는 사회의 바깥 세계가 가진 시선에서 그 사회를 재단 하는 사람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어느 날 찾아와 제 식대로 그 사회에 관한 기사를 쓰고 떠나버 리는 신문기자와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전이를 만들어내는 정신분석가를 떠올리든 라포를 맺는 인류학자를 생각하든, 자신이 이해하려는 그 대상과 관계를 맺는 능력이란 면에서, 안은미는 그 들 못지않은 달인에 가까운 솜씨를 보여준다. <조상님 께 바치는 댄스>를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감탄 했을 할머니들과의 경이로운 랑데부처럼, 이제 그녀는 한국 사회의 으뜸가는 모범생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다. 그녀를 만났을 때, 십대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짐 작되지 않는가. 그녀는 그 경계심과 호기심을 밑천 삼 아 아이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과정을 기록하 고 또 관찰한다. 이 때 춤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 려주는 아이들은 춤으로 쓰는 인류학이란 새로운 기획 에 참여하는 정보제공자들이 된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 자리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그녀의 춤 안에 담겨있 는 비판적인 페다고지는 이번에도 역시 어김없이 발휘 될 것이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노령의 몸에서 춤을 추는 몸을 되살려내듯이, 아이돌 댄스를 흉내 내는 아 이들의 몸에서 그녀는 그 아이들의 몸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끄집어낸 몸이 무엇일지, 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언젠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그녀가 들려 준 말처럼, 발광(發狂)이 될지, 신체의 완전한 소진(消 盡)이 될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의 몸을 규정하는 환상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몸과 결국엔 마주하게 될 것이다. <사심 없는 땐쓰>를 가장 온전히 즐기는 방법은 춤 의 관객이길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 때의 춤이란 유명 연예기획사의 대표들 앞에서 아이돌 의 꿈을 안고 춤을 추는 오디션 자리에서의 춤을 말한 다. 그녀가 춤을 출 때 그것은 바로 그 춤과 자신의 추 게 될 춤 사이에 놓인 거리 자체를 겨냥한다. 따라서 그녀가 춤을 출 때, 우리는 그것이 춤을 추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 시대에 춤이라고 알려진 것으로부터의 비 판적인 거리, 그 자체를 추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사심 없는 땐쓰>의 모든 재미 가 담겨있을 것이다. 그녀는 모범생 십대 아이들을 인터뷰하고 기록하면 서 또한 아이돌 음악에 박식한 현역 대중음악평론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미시적인 몸의 현상 속에서 역사의 현재를 발굴하는 역사학자의 목소리를 기꺼이 무대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사유한 모든 것을 다시 무대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무대 를 잘게 쪼개어 다양한 의례를 만들고 자신이 만나는 이들이 스스로의 몸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다. 그러므로 이처럼 다채로운 인류학적인 관찰의 전 체 공정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무대는 그저 또 한 가지의 춤이라는 것 속에 유폐되어 버릴 것이다. 그녀는 춤으로부터 달아나면서 다시 춤으로 끈질기게 되돌아오는 기이한 몸짓을 보여준다. 우리 시대의 사 회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그 신체의 세계와 상대하게 될 때, 춤은 다른 식으로 자신을 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춤 아닌 척하면서 춤을 추고 춤인 척 하면서 춤이 아닌 몸짓 사이를 왕복할 것이다. 그렇다 면 충분하다. 그녀는 바로 그 두 개의 춤의 몸짓 사이 에 놓인 거리에 우리 시대의 몸에 대한 자신의 반성을 위치 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학교 교수